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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를 만나다] <45> 8분 후의 미장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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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를 만나다] <45> 8분 후의 미장센

입력
2009.05.3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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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 후의 미장센-문혜진

8분 후, 태양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으로 돌변하고, 복지원 앞에 버려진 아기는 동파한 수도관처럼 얼어붙어, 당신의 배관 속 검은 머리 비단뱀, 8분 후면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겠지 순식간에, 저격수의 렌즈는 떨어져 나간 각막처럼 깜깜해지고 사냥꾼은 멧돼지를 쫓다 올무에 걸려 그림자 활극처럼 펄쩍 뛰겠지 그 모든 것들이 하늘을 보는 순간, 무수한 시간에 걸친 파괴적인 노력들이 고개를 쳐들고, 빌딩에서 투신한 넥타이는 비명에 목이 졸린 채 암전, 그리하여 8분 후 배우가 배역을 빠져나와 마스크를 쓰고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 고심하는 동안, 사막에서 화석을 찾는 사람들은 돌덩이 속에서 인류의 오래된 식인 습관을 발굴하지 황량한 바람이 불고,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안부를 묻는 목소리들은 외로운 얼룩으로 별들의 식민지를 떠돌다 멀어지겠지 8분 후, 시청 앞 시계는 12시, 알제리에서 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로 가던 물병자리 소녀는 화장실에서 혼자 아기를 낳지 유괴당한 아이는 앵벌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왼팔이 잘리고, 8분 후 도달할 태양 빛이 돌이킬 수 없는 어둠으로 돌변하자, 그 모든 시간차의 토타카와 푸가, 음역이 풍부한 암흑 속 먼지처럼 우리는 잠시 퍼덕이다 페이드아웃.

● 언젠가 태양은 사라지겠지. 친절한 과학자들이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실물이 사라지고 마지막 햇빛이 지구까지 건너오는 팔분 동안 종말은 유예된다. 팔분이면 커피 한잔을 끓일 수 있지. 연인들은 손을 꼭 잡을 것이고, 강아지는 다시 한번 풀밭을 달려볼 것이다. 그땐 정말 잘못했어요, 이러면서 아버지를 끌어안을 수도 있다. 팔분 동안 인간들 각자의 머릿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빠르게 요약될 것이다. 종교와 민주주의와 애정의 기술… 인류는 우주에 무엇을 남겼지? 그러나 흘러가는 나날은 늘 마지막 팔분처럼 우리의 관심과 보살핌을 바라고 있는 것을. 팔분간, 당신은 무엇을 할 텐가?

서동욱(시인ㆍ서강대 철학과 교수)

● 문혜진 1976년 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질 나쁜 연애> <검은 표범 여인> . 김수영문학상 (2007)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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