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금속, 석유 등의 원자재가 풍부한 국가에게 원자재 가격의 급락은 저주이다.
원자재 가격 하락은 원자재 판매 대가로 유입되는 달러를 감소시키고, 이는 재정 적자 확대, 기업 도산, 실업률 증가 등의 위기를 몰고 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융위기 이후 상품 가격 하락으로 세계 1위 콩 수출국 아르헨티나는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고, 천연가스ㆍ원유 대국인 러시아가 미국에 맞서던 시절이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위축된 상태이다.
그런데 세계 1위 구리 수출국인 칠레가 구리 가격의 급락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고 있어 주목 받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칠레는 최근 200억달러를 투입해 광산 개발, 도로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등을 골자로 하는 대규모 경기 부양에 나섰다. 경기부양 금액은 국내총생산(GDP)의 2.8%에 해당하는데 미국의 2%보다 높은 비율이다. 이 덕분에 칠레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0.5%로 세계에서 가장 견실한 수준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칠레는 외채가 없는 순채권국이기도 하다.
주목할 대목은 칠레의 경기부양 소요 자금 200억달러가 과거 구리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저축해 모아둔 것이라는 점이다.
구리 수출이 정부 수입의 근간을 차지하는 칠레 정부는 2006년 정부 예산을 향후 10년간의 국제 구리가격 예상치의 평균에 맞춰 짜도록 하는 법안을 시행했다. 그때 그때의 구리 가격에 맞춰 예산을 짜던 종전 방식에서 탈피한 것이다.
이듬해인 2007년, 향후 10년간의 평균 구리 가격이 파운드 당 1.21달러로 예상됐는데, 실제 구리가격은 파운드 당 3.23달러로 치솟았다. 그러자 칠레 정부는 차액을 비축 펀드에 예치했다. WSJ은 "아르헨티나가 콩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시중에 풀면서 페소화 절상, 기업의 수출 경쟁력 둔화, 물가상승의 부작용을 겪었다"며 "칠레가 구리 가격 급등 시기에 흥청망청하지 않은 덕분에 이제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됐고 어떤 은행도 구제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정책을 주도한 안드레스 벨라스코(49) 재무장관은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미 콜롬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아버지는 법학 교수로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을 비판하다 국외로 추방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민주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