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철새는 살 맛… 우린 죽을 맛이랑께"/ 광주 운암산 서식지 인근 주민들 '몸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철새는 살 맛… 우린 죽을 맛이랑께"/ 광주 운암산 서식지 인근 주민들 '몸살'

입력
2009.05.28 00:51
0 0

"꿱꿱, 꿱꿱" "째재재잭, 짹재글."

26일 오후 광주 북구 동림동 운암산(해발 131m) 자락. 15층짜리 아파트 2개 동과 바짝 붙어있는 야트막한 능선 소나무 숲에서 쉴 새 없이 나는 새 소리는 마치 깊은 산 속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이 곳엔 왜가리와 쇠백로, 중대백로, 해오라기 등 여름철새 수백마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잿빛 왜가리들이 '꿰~엑' 소리를 내며 먹잇감을 찾아 아파트 위로 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 좋다. 도심에 이런 곳이 있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담장 너머 아스팔트 바닥 곳곳에 흰 새똥 자국이 얼룩져 있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사정은 달라진다. 주민들은 "재수 없으면 새똥 맞으니 조심하라. 저 놈들(철새들) 때문에 아주 죽겠다"며 혀를 찼다. 한때 자연과 도심의 아름다운 조화를 얘기하며 "멋지다"는 반응을 보였던 그들이었다.

그랬던 주민들이 이제 철새만 보면 몸서리를 친다. 250가구 840여명의 주민들은 아파트 코 앞 야산에 2월부터 여름철새들이 떼로 날아들면서 철새 울음소리와 악취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 이날 철새 집단서식지와 불과 20~30m 떨어진 이 아파트 101동과 103동 건물 사이를 지나가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주민 박모(48ㆍ여)씨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며 "한여름에는 철새 서식지에서 풍겨오는 역한 냄새 때문에 베란다 창문도 마음대로 열어 놓고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 운암산 자락에 서식하고 있는 여름철새는 왜가리 등 5종 1,000여 마리. 1997년께 황룡강을 끼고 있는 광산구 어등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던 철새들이 아파트 공사 등 각종 개발사업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북구 중외공원(2000년)과 동림동 용산 자락(2003년) 등지를 옮겨 다니다 작년부터 이 곳으로 날아와 여름을 나고 있다.

철새들은 이 달까지 새끼를 부화하고 9월까지 머무르다 동남아 지역으로 떠나지만 이 중 200여 마리는 아예 텃새화 했다.

이두표 호남대 생물학과 교수는 "왜가리와 백로 등은 천적의 침범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사는 마을 인근에서 번식하는 습성이 있다"며 "운암산 자락은 마주 선 아파트가 외부 위협을 차단하는 철새들의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는 데다 광주천을 끼고 있어 먹이도 풍부해 철새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철새들이 번잡한 도심 안에 서식하는 무척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지자 환경단체와 조류학자들은 "광주 도심 생태계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라며 반겼지만, 주민들에게 철새는 그저 '미운 철새 놈들'일 뿐이다.

"새똥과 먹이로 물고 온 물고기 썩은 냄새는 둘째 치고 철새 울음소리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예요. 어떤 때는 아이들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죠. 새 깃털이 방충망에 끼고, 배설물까지 맞아 보세요. 정말 죽을 맛입니다."

네 살쯤 돼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던 주민 이모(39ㆍ여)는 "올 여름을 또 어떻게 나야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새들의 깃털에 아이들이 천식을 호소하고 피부질환까지 생겼다"며 "철새 보호도 좋지만 사람이 먼저 살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거들었다.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자 북구청은 이 달부터 매주 한차례씩 철새 집단서식지에 탈취제를 살포하고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조류 인플루엔자(AI) 발병을 막고 악취를 없애기 위해서지만 효과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일부 주민들은 "철새를 쫓아내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해야 한다"는 격앙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실제 운암산 철새 집단서식지 주변에는 누군가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잇고 딸랑거리는 깡통을 줄줄이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 그 줄을 흔들어서 철새들을 쫓아보내겠다는 속내였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문제는 주민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다. "철새를 쫓아서라도 피해가 없게 해달라"는 대다수 주민들과 "사람과 철새가 공존해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단체들은 아파트 옥상을 철새 탐방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방안까지 내놓은 터였다.

광주ㆍ전남 녹색연합 박필순 사무처장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속 철새들을 쫓아낼 수는 없다"며 "그러나 주민들이 겪는 불편을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행정기관과 정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하고 공론화해 주민들을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주민들은 "철새 노이로제에 걸리다시피 한 주민들의 스트레스 검사와 피부ㆍ호흡기 질환 감염 등을 확인하는 건강검진이라도 실시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주민 장모(41ㆍ여)씨는 "도대체 언제까지 주민들만 피해를 보고 살아야 하느냐"며 "해당 구청 등도 주민들에게 철새와 함께 살라고만 할 게 아니라 최소한 피해 주민들의 건강검진을 실시해 안심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안경호기자 kha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