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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수상한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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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수상한 찬사

입력
2009.05.2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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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느냐 미안해하지 누구도 원망하지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직전 23분간 작성해 자신의 컴퓨터에 남긴 14줄 유서 전문이다.

▦ 전문가들은 극도로 절제된 표현으로 처절한 심경을 전한 이 글에서 우울증에 가까운 고인의 마지막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힘들다고 생각한 점,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봤다는 점,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한 점 등은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서울 성모병원 정신과 김대진 교수)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서에 나타나는 억울함이나 한스러운 감정이 없는 것에 주목하며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로서의 책임감과 죄책감이 작용한 것 같다"(한양대 구리병원 최준호 교수)고 풀이하는 의견도 있다.

▦ 그런데 고인이 하는 말과 일이라면 도끼눈부터 부릅뜨던 사람들이 돌연 이 유서에 수상한 찬사를 보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서는 담백하게 쓰여진 명문이다. 혹자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려가 없는, 너무 사적인 글이라고 비판하나 그런 점에서 오히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 담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그의 마지막 말에선 (자신이 씨앗 뿌리고 키운) 증오와 갈등을 치유하려는 생각이 엿보인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대목이다.> "자살이 아니고 왜 서거냐"고 시비했던 극우논객 조갑제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 귀를 의심할 만한 찬사의 속셈과 의도는 다음 대목에서 곧 드러난다.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고인의 뜻을 지지자와 언론, 특히 방송이 따라준다면 그의 죽음은 역사적 의미를 남길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증오와 갈등과 분열을 확대재생산한 책임이 한층 더한 자신들에게 거센 비난이 돌아올까 봐 지레 겁먹은 꼴이다. "고인의 죽음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 방법이 있다"면서 고작 방송의 자중자애를 거론한 것은 더욱 우습다. 울분과 냉소가 교차하고 감정이 충돌하는 민감한 시기에 성찰의 시간은 갖지 않더라도 역겹게 날뛰지는 말아야 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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