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지음/창비 발행ㆍ148쪽ㆍ7,000원
명료하고 절제된 시어, 세상의 모순과 고통을 싸안는 따뜻한 감성…. 나희덕(43ㆍ사진) 시인의 시세계는 이런 규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스물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은 따뜻한 서정의 시편을 선보이며 평단과 독자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고 30대 중반에 대학 교수가 됐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삶과 문학은 "모범생" 의 그것이었다.
여섯번째 시집 <야생사과> 에서 나씨는 모범생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갱생의 의지를 표출한다. "예술은 자기 표현이자 자기 부정"이라는 그는 자신을 버리고 또 다른 자신을 찾는 싸움을 벌인다. 그것은 '어쩌면 좋아요 나를 부르려는데/ 내 이름이 사라졌어요 이름 밖에서 서성대는/ 아이 하나, 복도는 너무 길고 캄캄해요'('누가 내 이름을'에서)와 같은 당혹감의 표출이나, '나를 스르륵 지워버리고 싶어!/ 벗어나도 벗어나도 내 속에 갇혀있는/ 나를 건져내고 싶어!'('존 말코비치 되기'에서)와 같은 절규로 이어진다. 야생사과>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감각의 시가 반향을 얻고 있는 이즈음, 서정시의 미학적 전통을 고수해온 나씨가 언어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을 표출하는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꽃만 따먹으며 왔다/ 또옥, 또옥, 손으로 훑은 꽃들로/ 광주리를 채우고 사흘도/ 가지 못할 향기에 취해 여기까지 왔다… 뿌리를 드러낸 나무 앞에 며칠째 앉아있다'('말의 꽃'에서)는 서정적이고 절제된 언어를 편애해온 자신의 시적 방법론에 대한 반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점묘법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그림에서 얻은 영감은, 명확한 의미를 드러내는 시어의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과도 맞닿아 있다. '…나팔을 부는 소년도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도 처음엔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었지요 그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을 빻고 또 빻는 일뿐이었어요.'('쇠라의 점묘화'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시적 언어가 '선(線)'과 같은 것이었다면 향후 그것이 '점(點)'과 같은 것으로 변모할 것임을 암시한다.
"젊어서부터 세상과 어긋나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중년에 들어서자 문학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고 나씨는 말했다. 그의 이번 시집은 세계와의 화해 대신 불화를, 자신의 문학적 기반에서의 안주 대신 탈주를 꿈꾸는 싸움의 기록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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