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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죽창도 죽봉도 아닌

입력
2009.05.25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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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대전 화물연대 시위에서 사용된 대나무 장대의 이름이 가지가지다. 처음 '죽창'이란 말을 꺼낸 경찰은 이명박 대통령이 19일 국무회의에서 '죽창 시위'에 언급한 후 아예 그렇게 통일했다. 반면 검찰은 '죽봉', 법원은 '만장깃대'라고 썼다. 언론까지도 '죽창'과 '죽봉' 등으로 나뉘었다. 한국사회의 분열이 이토록 선명한 예도 드물다. 일반적 언어감각을 휘젓는 서로 다른 이름에 저마다의 인식을 담았다.

가장 귀에 선 말이 '죽창'이다. 경찰은 처음 가늘게 갈라져 때리기보다 찌르기에 적합한 '흉기'가 되는 대나무의 특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찌르는 '흉기'가 어디 창뿐인가. 작살이나 화살, 꼬챙이는 물론 칼도 있다. 우리의 언어감각은 이런 것들과 창을 쉽사리 가려낸다. 날선 부분의 굵기나 길이, 전체적 모양이나 사용법 등 다른 요소를 고려한 결과다. 우산살처럼 가늘게 갈라진 대나무를 '죽창'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역사가 '죽창'이란 말에 덧씌운 이미지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죽창은 멀게는 노비의 난이나 민란, 가깝게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처절하게 수놓은 동족상잔의 좌우대결에서 으레 등장했다. 영화나 드라마로 본 죽창은 예리한 각도로 잘렸고, 어떤 무기보다 쓰임새가 잔혹했다.

경찰 눈을 찌른 '흉기'

경찰은 화물연대 집회 이후 거둬들인 대나무 장대 600여 개 가운데 20여 개의 끝이 제법 날카롭게 잘려있음을 강조했다. 뒤늦게 '죽창'의 어감에 눈뜬 셈이지만 공개된 '죽창'의 잘린 각도는 전통적 죽창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톱이 아닌 낫으로 잘랐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죽창'에 비해 '죽봉'은 느낌이 한결 부드럽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을 '대나무 막대'나 '대나무 몽둥이'의 뜻으로 만들어 쓴 검찰의 고민이 느껴진다. 각목이나 쇠몽둥이처럼 폭력성은 남았지만, '죽창'의 이념성은 사라졌다. 또 몽둥이도 '흉기'지만 무게가 가벼운 대나무의 특성상 '죽창'에 비해 '흉기성'도 크게 떨어진다.

그러나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 소속 강호경 의경의 왼쪽 눈을 찔러 실명위기까지 부른 '흉기'를 가리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죽봉'은 그 흉기보다는 굵고, 날카롭게 찌를 수도 없다. 강 의경에게 중상해를 입힌 범죄 도구의 '흉기성'을 지나치게 흐린 말이다.

'만장깃대'는 법원의 가치중립적 자세를 드러내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이다. 일시적 쓰임새에 치중한 이름이어서 만장을 떼어내고 시위에 사용한 도구를 가리킬 수는 없다.

시위대는 대나무 장대를 썼다. 바지랑대로 쓰던 것이든, 만장깃대로 쓴 것이든, 길에서 주운 것이든 그것으로 경찰과 맞서겠다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다. '만장깃대'나 경찰을 두들기는 '죽봉'으로도 쓰였을 게다. 그러나 시위가 길어짐에 따라 수십 가닥으로 갈라진 대나무는 진압경찰의 얼굴과 목 등을 날카롭게 찔렀다. 부상 경찰 대부분이 이 대나무 살에 찔렸다. 시위대가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의도했는지는 앞으로 수사 당국과 법원이 가리겠지만, 대나무 장대를 도구로 한 폭력시위는 분명히 있었다.

자유와 평화 조화시켜야

그리고 며칠 뒤 정부는 폭력시위가 우려되는 도심에서의 대규모 집회를 원칙적으로 불허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아직 정부 방침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할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폭력시위 전력 등을 감안해 한결 '금지'가 심해질 것은 불을 보는 듯하다.

이를 두고 사실상의 집회 허가제를 도입하려는 위헌적 발상이라는 반발이 커지는 한편으로 불법ㆍ폭력시위를 철저히 막아달라는 여론의 요구도 전에 없이 무성하다. 창이냐, 봉이냐는 아전인수식 논란의 속편일까 우려된다.

헌법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허가제를 부인하면서도 사회안녕질서를 위한 제한을 용인했다. 이에 따라 현행 집시법은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 시간적ㆍ공간적 금지를 가능하게 했다. 현재의 논란도 이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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