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할매를 맡은 배우는 정말 할머니일까?" "글쎄, 아까 옷 사이로 살짝 보이는 발목을 보니 젊은 사람 같기도 하고…."
고단한 서민의 일상을 따뜻하고 경쾌한 시선으로 그려 인기를 얻고 있는 뮤지컬 '빨래'의 매회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극장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대화다.
많은 관객이 실제 노배우로 착각할 만큼 진솔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주인공은 데뷔 19년차 배우 이정은(40)이다. 40년째 장애인 딸을 돌보는 슬픔을 거친 사투리 속에 숨긴 주인할매는 조역이지만 커튼콜 때 쏟아지는 박수의 세기만 보면 주인공과 진배없다.
"어유, 요즘 제 연기에 향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이 많은데 이럴 때 인터뷰 오시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몰라요." 옅은 화장, 티셔츠 차림의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럽다는 듯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무대 위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제 연기를 좋게 봐주신다면 현실 세계에 주목한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산 경험이나 전남 목포 출신이신 지인의 어머니와 친하게 지낸 일들이 도움이 많이 됐거든요. 하지만 지금도 좋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제 연기가 하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범한 외모 때문에 부모님마저 배우의 길을 말렸다"는 그는 "가장 재미있고 앞으로 더 잘할 것 같은 연기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 '춘풍의 처' '라이어', 뮤지컬 '모스키토' '슈퍼맨처럼' 등을 거쳤다. 1997년 설경구와 함께 출연한 '지하철 1호선'에서는 역시 노역인 곰보할매를 맡아 호평을 얻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칭찬은 독이 될 수 있다"고 되뇌곤 한다고 했다. 이번 주인할매를 향한 관심은 인생과 역할의 접점이 잘 맞아 떨어진 데서 비롯된 것일 뿐, 다른 배역으로는 "앞으로 연기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주인공처럼 생동감 있는 인물을 그리자는 연기 철학을 갖게 된 것도 실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저도 어린 후배들처럼 주인공만 하고 싶고 유명해지겠다고 안달을 내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다 슬럼프랄까, 무대를 몇 년 떠나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현실 세계에 주목하게 됐어요."
물론 욕심을 버렸다고 해서 야망이 작아진 것은 아니다. '사실성을 잘 그려낼 수 있는 배우'가 그의 궁극의 꿈이다. 한 때 후배 신하균에게 제작비를 융통해 연극 연출에 나섰다 흥행에 실패한 것이나 최광일 등 동료 배우들과 연습실을 차렸지만 월세를 못내 문을 닫고 만 가슴 아픈 사연을 갖게 된 것도 그런 그의 꿈 때문이다.
"어디서 본 연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인터뷰 후 행선지는 정형외과였다. "허리가 워낙 안 좋은데 나이 든 연기 한다고 무대에서나 대기실에서나 늘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 병이 도졌어요. 의사 선생님은 자세를 똑바로 하라고 하시는데 미련하게 연기하는 방법밖에 몰라서…." 40대를 백발 노파로 착각하게 만드는 연기 내공은 분명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6월 14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02)744-1355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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