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지났다. 그러나 빠른 회복을 기대하지 말라"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를 비롯, 세계 경제 석학과 금융 전문가들의 금융위기에 대한 일치된 견해다.
19일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제TV 주최 세계 경제금융 컨퍼런스에 모인 크루그먼 교수와 노버트 월터 도이치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 찰스 프린스 전 씨티그룹 회장 등은 세계 경제가 회복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회복 분위기에 편승해 금융규제 강화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금융회사들의 로비가 치열하다면서, 이번 금융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규제 강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또다른 위기를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각국이 대규모 재정지출을 하고 있는데, 이를 부실기업 구제에 낭비하기 보다는 친환경 분야나 교육, 보건 복지 분야 등 앞으로 국가 부채를 짊어질 미래 세대를 위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크 모비어스 템플턴자산운용 회장은 이 와중에도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투자기회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 폴 크루그먼 美 프린스턴대 교수 "잃어버린 5년·10년 맞을 가능성"
"지구 밖 행성에 수출을 하지 않는 한 경제가 일찍 회복되기는 힘들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세계가 수요 부족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서 "잃어버린 5년이나 10년을 맞이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90년대 일본보다 더 심한 불황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만약 자신의 견해와 달리 급격한 경기 회복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2018년께 더 엄청난 위기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와 롱텀캐피탈펀드 사태 등은 10년 후 지금 사태의 예고편이었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 사건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이번 경제위기의 1차시기는 대공황의 1차시기와 상당히 유사했지만 앞으로 대공황의 2차시기가 연출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악의 국면은 지나갔지만 안정화를 지나서 실질적인 회복의 길에 접어들려면 매우 길고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과 증권화, 금융기관의 과도한 리스크 감수, 주택버블 등이 이번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세계적 관점에서 좀더 폭넓게 바라보면 위기의 본질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과도한 대출"이었다고 분석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따라서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없이도 이번 금융위기는 초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디레버리징'(부채 청산) 과정이 끝나지 않는 한, 위기가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저축률은 다시 0%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소비심리도 위축된 상태가 지속될 것이며, 주택부문의 과잉 재고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부양책도 국내총생산(GDP)의 2.5%밖에 되지 않아 경기 후퇴를 늦출 수는 있겠지만 되돌리지는 못할 것으로 평가했다.
근본적인 회복의 길로 접어들 방법에 대해서는 환경 정책에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탄소배출권 거래제(cap and trade)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다만 이것이 경제회복을 추동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마크 모비어스 템플턴자산운용 회장 "아시아 증시 지금이 투자할 때"
신흥시장 투자에 대한 최고 전문가로 인정 받는 마크 모비어스 템플턴자산운용 회장은 중국이나 인도 등 아시아 증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으며 "지금 투자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참석자 중 유일하게 낙관론을 편 것이다.
또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 걱정"이라는 경제학자들과 달리, 그는 "공급 과잉이 심각한 부동산을 제외하면 원자재 등 대부분 자산이 인플레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서 "각국 정부가 통화량을 신속하게 축소하지 않으면 인플레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급증하는 유동성과 아시아의 정부지출 등을 근거로 아시아 증시 투자를 권했다. 모비어스 회장은 "협의통화(M1)와 광의통화(M2)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면서 "투자금이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는 개도국도 성장률이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와 중국은 상대적으로 가장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국의 경우 수출 감소가 문제되고 있으나, 실제 수출 의존도는 홍콩과 싱가포르가 GDP 대비 200% 이상이고 한국도 57%인 반면 중국은 37%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이 대규모 재정지출을 위해 국가부채를 져야 하는 반면, 중국은 2조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와 1조달러 상당의 해외투자 자산을 축적하고 있어 그 같은 재정지출을 감내할 만한 여력이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템플턴자산운용은 중국과 인도의 인구가 각각 10억이 넘어 소비를 늘려나가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면서 "특히 중국 포트폴리오에 내수용 자동차주를 많이 편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에 대해서는 재벌 체제와 연관한 독특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한국인들은 부패했던 사람들, 불의를 초래했던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면서 "재벌이 하나 있고 자회사들이 여럿 있으면 자율성, 창의성이 침해되지만 재벌구조가 변화하면 더 많은 생산성과 부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템플턴 경은 '투자의 최적 타이밍은 돈이 있을 때'라고 말했다"면서 "타이밍을 잡기는 어려우므로 장기적 가치를 찾는 방향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찰스 프린스 前 씨티그룹 회장 "수학적 예측력 맹신이 위기 원인"
"전통적인 월스트리트는 내가 30여년간 일해왔던 세계다. 그 세계가 사라졌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로 씨티그룹이 천문학적 손실을 입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났던 찰스 프린스 전 씨티그룹 회장은 월가 한복판에서 금융위기의 전후를 생생히 경험한 사람답게 반성적 관점에서 금융위기의 원인과 교훈을 분석했다. 그는 제2의 위기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강력하고 효율적인 규제와 리스크 측정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프린스 전 회장은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중국과 개도국 중 일부 국가들이 막대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미국의 재무성 채권을 구입해 다시 미국에 투자하는 글로벌 불균형 현상과, 유동성 버블을 막지 못한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무능을 지적했다.
또 금융상품과 금융산업은 수십 년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한 반면 규제와 감독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특히 감시와 규제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규제 완화를 더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프린스 전 회장은 마지막으로 "수학적 예측력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문제"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믿음이 금융업계와 신용평가업계에 너무나 확고하게 퍼져 있었다면서,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은 "최상위 증권화 상품은 너무나 안전하기 때문에 이들이 재무성 채권을 대체하는 초안전 상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프린스 전 회장은 따라서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글로벌 불균형을 국제 공조를 통해 시정하고, 각국 중앙은행은 적절한 통화정책을 써서 자산 버블을 막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감독과 규제의 문제는 개별 국가 내에서나 국가 간 개혁 움직임이 진행 중이어서 고무적이지만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있다"고 비판한 뒤, 금융회사들의 로비에 굴하지 말고 헤지펀드, 보험사, 증권사 등 그림자 금융시스템에 대해서도 좀더 포괄적인 규제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렵지만 가장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수학적인 모델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미래를 수학 공식으로 예측하는 관행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리스크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