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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 간 '마더' 김혜자 "아들 위한 엄마의 광기 누구든 있는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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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 간 '마더' 김혜자 "아들 위한 엄마의 광기 누구든 있는것 아닐까요"

입력
2009.05.19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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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까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안방극장의 여왕 김혜자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5월 프랑스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을 줄이야. 그리고 그에 앞서 그를 스크린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관객들은 또 얼마나 됐을까.

제62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된 '마더'는 오래도록 잊혀졌던 '영화배우' 김혜자의 부활을 알린다. 살인죄로 잡힌 아들을 구하려는 한 엄마의 광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김혜자는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마성의 연기를 스크린으로 확장한다.

칸을 찾은 각국 기자들 사이에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면 아주 유력한 최우수 여자주연상 후보였을 텐데"라는 아쉬움 가득한 평가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1999년 고 최진실과 모녀로 연기 장단을 맞췄던 '마요네즈' 이후 10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 그는 "딱히 영화를 멀리하려고 하진 않았다"고 했다. 단지 "영화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왔지만 TV드라마와 유사한 엄마 역할들이어서 흥미가 없었을 뿐"이라는 것. "연기하는 재미도 없지만 보는 사람은 또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생각이 작용했다.

'마더'는 김혜자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발견에서 비롯됐다. 봉 감독은 자애롭고 따스한 TV드라마 속 김혜자의 모습에 깃든 기이한 히스테리를 엿봤다. "TV토크쇼에서 나타난 김혜자의 4차원적인 표현법도 흥미로웠다"는 봉 감독은 "잘 알려진 배우를 새롭게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으로 '마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68세에 생애 처음으로 칸영화제를 찾았다지만 감회가 남다르진 않았다. 그저 '마더'가 어떤 평가를 받을까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칸 시사를 앞두고 "(아들 도준 역을 맡은) 원빈에게 '우리 그냥 파리로 도망 갈래'라고 말했을 정도"로 마음을 졸였다. "레드 카펫을 걸을 땐 드레스 밟지 않고 계단을 잘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만 했고 영화는 원빈의 손을 꼭 붙잡고 봤어요."

배우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을 칸에 대한 꿈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고 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일에만 충실하려고 하는 성격"의 영향이다. "저는 커다란 욕심이 없나 봐요. '앞으로 뭘 해서 어떻게 돼야지' 하는 생각은 제게 없는 듯해요. 사실 인간이 무슨 계획을 세운다고 다 이뤄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그는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면 여우주연상 감'이라는 평에 대해선 "오, 그랬어, 진짜? 그런 일은 왜 안 벌어졌을까. 그럼 참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라며 소녀 같은 호기심과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촬영을 하는 동안 특히 힘들었던 연기는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었다. 그는 스산한 바람이 갈대와 나뭇잎을 흔드는 벌판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라틴 풍의 음악에 맞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춤을 춘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이 춤은 인간의 음습한 욕망과 핏빛어린 광기를 압축하며 영화 속 엄마의 비극을 암시한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너무 무안해서 제 앞에 있는 모든 분들도 함께 춤을 추자고 했어요. 봉 감독도, 제작사 대표님도 춤을 추고 모든 스태프들이 몸을 움직였어요. 그런데 카메라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 하나 둘 제 앞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지더군요. 그 뒤엔 그냥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에요. 이 장면을 위해 딱히 춤을 배우지도 연습하지도 않았어요."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마더' 속 엄마의 광기를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요소"라고 말했다. 현실에서 '마더'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나도 분명히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는 '마더'에서 인간 삶의 비극적 원형질을 발견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리스 비극처럼 숨은 그림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이 연인으로, 아들의 친구와 이상한 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영화에요."

■ 시사회서 '무조건적 모성애'에 뜨거운 갈채"

지능이 다소 모자란 28세 청년 도준(원빈)은 어느날 여고생 살인죄로 체포된다. 오직 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홀어머니(김혜자)는 경찰 조사를 믿지 않고 아들의 무죄를 밝히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렇게 그녀는 살인자의 실체에 근접하고 엄청난 비밀과 비극을 맞닥뜨리게 된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마더'(28일 개봉)는 우리들 의식 속에 견고히 자리잡은 상식을 깨뜨리는 영화다. 인류의 모든 갈등과 고통과 상처를 품에 안으며 치유해 줄 듯한 모성애에 대한 판타지는 '마더'를 통해 여지없이 깨진다.

따스함과 정겨움이 응당 따라붙어야 할 엄마라는 輧楮?차가움과 섬뜩함이 대신 자리한다. 엄마의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불러낸 핏빛 광기가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모성애가 지닌 어두운 이면을 들춰내는 봉 감독의 화법도 예상을 벗어난다. 화려한 테크닉으로 잽을 던지며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을 링 구석에 몰아넣었다가 매끄러운 훅으로 다운을 시켰던 기존의 연출법과 궤를 달리한다.

봉 감독은 잔뜩 웅크린 채 펀치를 아껴 힘을 모았다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어퍼컷 한 방으로 관객을 녹아웃 시킨다. 영화 속 누군가처럼 방심했다가 육중한 몽키 스패너로 뒤통수를 사정없이 얻어 맞은 듯하다.

'봉테일' 특유의 섬세함으로 전반부에서 하나하나 감정의 벽돌을 쌓아가다 후반부에서 정서를 폭발 시키는 '마더'의 화법은 일부 관객들에겐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마더'를 향한 제62회 칸 국제영화제의 시선은 호의적이다. 16일 오후 2시(현지시간) 열린 첫 시사에 참석한 각국 기자들은 '박쥐' 때보다 더 뜨거운 박수로 '마더'의 완성도에 경의를 표했다. 영국의 영화주간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온라인 리뷰를 통해 "봉 감독이 한국의 가장 다재다능한 젊은 작가임을 보여주는 매우 만족스러운 영화"라고 높게 평가했다.

칸=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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