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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26> 판화가 이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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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26> 판화가 이용길

입력
2009.05.19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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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갈 때면 그의 집 앞에는 형사가 얼쩡댔다. 31돌을 넘긴 환경단체, 낙동강보존회의 창립 회원으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구호를 외쳐대니, 요주의 선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판화가 이용길(71)씨가 최근 또 다른 차원에서 주목받고 있다. 3월 27일 부산시립미술관에 50여년간 모은 미술 관련 자료를 모두 기증한 것이다.

미술 서적 1만여권, 부산 미술 관련 기사 스크랩 100여권, 전시 팸플릿 수천부, 포스터 500여점 등 한데 모으니 10톤 트럭 1대분이었다. 현재 분류ㆍ정리 작업 중인 이 자료들은 상반기 중으로 미술관 내 '부산미술자료정보센터'라는 간판 아래 완벽한 데이터 베이스로 거듭난다.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그의 집은 여전히 각종 미술 자료 더미에 파묻혀 있다.

- 어쩌다 그렇게 많은 자료들을 모았나

"보고 즐기려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됐다. 1960년대는 인사동 뒤져 미술 관련 자료 모으고, 70년대는 대한민국의 미술 서적은 다 구했다. 80년대부터는 너무 쏟아져 나와 포기했지만. 이후로는 신문 기사나 팸플릿에 의지해 부산 미술사 자료들을 모았다. 국내 미술 전문지 '공간'과 일본의 '미즈에' 등 1960~90년치 미술 잡지들은 거의 다 있을 거다.

- 하버드대에서도 알았다는데

"그 곳 한국학연구소에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자료의 실증적 중요성을 증거하는 자료'라며 <부산미술사료> (2006ㆍ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연구회 발행)를 부쳐 달라고 지난 2월 요청하더라.

원래는 200자 원고지에 쓴 것을 문헌정보학 전공한 딸이 컴퓨터에 입력, 이를 근거로 책을 만들었는데 그게 부산발전연구원의 도메인(www.bdi.re.kr)에 올라 인터넷에 노출된 것이다.

그 책은 <부산 미술사 연구를 위한 사료 정리> , <가마골 꼴아솜 누리('부산 미술계 반세기'를 그가 순 우리말로 바꾼 표현)> 등 지금껏 낸 단행본3권 중 하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의 연구자도 부산발전연구원 사이트에 들어가 자료를 구하기도 하더라. 그러잖아도 서울의 주요 미술관이나 미술 전공자들은 진작부터 내가 모은 자료의 단골 대출자들이었다. 정확한 미술사를 위한 실증 자료로 쓰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같은 체계적 정리는 전국적으로도 없는 일이라고 서울의 평론가들도 감탄한다.

- 어떤 점이 그토록 중요하게 비쳤을까

"1920~1990년대 부산 미술은 거기 다 있다. 전람회 자료, 평, 관련 기사는 기본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1948년 국전보다 1년 앞서는 부산미술전람회를 구경한 뒤, 중학 때부터는 전람회 팸플릿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잃어버렸다. 지금 갖고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료는 부산상고1학년 때인 1954년 다방에서 했던 어떤 동인전의 팸플릿이다.

- 예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당신에게는 부산이 늘 중심이었다. 서울이 싫은가.

"나는 처음부터 '가진 자들을 위해 작품하지 말자, 대중을 위해 (예술을) 보급하자,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하자'고 생각해 왔다. 돈 많이 안 생기면 저급 미술이라는 미술계의 의식에 대한 반감이다.

미술도, 매스컴도 상업성에 편승하는 데가 서울이다. 미술 전문지란 것들을 보라. 시민의 눈은 관심 밖이다. 잣대는 오직 돈이다. 그걸로 연중(年中) 사기 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작가들은 모두 돈 버는 예술 행위를 할 뿐이다. 그런 일 안 해도 되는 이 곳 부산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

이른바 대평론가들의 선동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서울의 미술계에는 마피아 같은 조직이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거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미술 잡지들은 고급스런 용어로 시민을 헷갈리게 할 뿐이다. 서울의 미술계는 시민을 위한 아름다움의 발굴은 없고, 눈을 왜곡되게 할 뿐이다.

- 요즘 기성 작가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목판화를 고집하는데.

"나는 대한민국 판화 1세대다. 목판을 택한 건 가난해 목판화밖에 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가장 큰 이유다. 동판화를 배우러 1870년대 말에는 일본에 살기도 했고, 실크스크린이나 석판화도 좀 한다. 물론 고교 이후 수채와 유화도 해 왔다.

동판화 같은 것은 섬세함이 내 성질과 안 맞기도 하지만, 목판화를 정규 미술로 인정하지 않는 기존 미술계의 관행에 반발심이 일었다. 목판화는 이른바 '적극적 순수 조형의 세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웃사이더로 몰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흑백 세계의 깊이를 살려, 파고 찍는 게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대중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생생한 느낌을 솔직히 표현해 왔을 뿐이다."

- 라틴 아메리카나 중국이 혁명할 당시, 목판화는 민중예술로 각광받았다.

"판화는 시민을 위한 예술이다. 판화가 발전한 것은 대량 생산의 매력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죽고 난 뒤 가격 오르는 '물건'이 아니라, 돈이나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다. 이중섭의 스케치를 1억 주고 사면 어쩌잔 말인가. 예술이 그렇게 (자본에)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판화 작품은 도서관에서도 취급된다. 인쇄물이자 도서관의 컬렉션이기 때문이다. 판화는 원래 글 모르는 민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시작됐다. 팔만대장경도 원래 표지가 있었는데, 이름없는 각인(刻人)들이 불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엄변상도(華嚴變相圖)'가 그것이다(그는 소장 중인 원화 몇 점을 보여주었다).

화엄경을 80권으로 나눠 텍스트를 쓰기 전, 앞으로 나올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각(刻)한 것이다. 이는 민중미술의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듯 못 가진 자를 위하는 편에 선 그림이 판화다.

- 그 같은 사실을 판화 시작할 때부터 의식했나.

"미술과 철학 서적을 고교 때부터 찾아 봤다. 고흐, 고갱이 민중 미술가였다는 사실을 안 것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보고서였다. 스탈린과 히틀러 전기를 나는 당시 '똥종이(시멘트 포장 용지)'에 찍힌 글로 봤다. 내가 고교 다닐 때, 지식욕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책 봤다. 모두 순전히 자발적이었다.

좀 더 깊이 알려면 인문학, 철학을 해야 하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반대다. 철학과 문학을 모르는 화가들이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 특이한 것만 만들어 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매스컴이 부추기는 탓이다. 중국 미술도 썩어빠지고 있다. 진짜 민중 미술가는 앞에 나서지 않는다.

- 중앙 무대에 왜 안 나오나.

""니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너는 망하는 거다, 임마." 아끼는 후배한테 하는 말이다. 상 안 받고 안 팔리는 게 낫다. 그래야 순수한 미술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서울이란 데는 모두 똑같아지는 곳이다.

나는 지방을 '제자리'라고 한다. 상업성에 휩쓸리지 않고 사는 이 편안함을 서울은 모른다. 예술가는 시민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인데, 서울은 돈 만드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 부산 사람만이라도 즐겁게 해 주니 이만하면 나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백남준이 "내 작품은 사기"라고 털어놓은 것은 최근의 후련한 소식이었다. 예술을 빙자해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 요즘 예술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할 사람이 요즘은 없다. 엉터리 조형 예술을 엉터리라고 말 못하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예술은 보통사람이 이해 못하는 것"이란 말까지 버젓이 통한다. 논어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 되고 나서 미술하라'는 말이다."

- 부산 사랑이 극진하니, 부산에서 보답도 했겠다.

"2007년 10월 부산광역시장으로부터 '문화상 전시 예술 부문'을 부산판화가협회 고문의 자격으로 받았다. 1989년 11월 부산 향토문화사업협회의 제 18회 향토문화상(판화 작업ㆍ교육), 1970년 부산 판화협회상 같은 것들이 있다.

- 혹시 서울에 대한 열등의식은 없나 .

"솔직히 그런 것도 있다. 돈벌이 못 하고 알랑대지 못한다는…. 그러나 인정하고 나니 편하고 자유스럽다. 열등의식이란 타인을 죽이기도 한다. 나는 '꼴값하네'가 참 좋은 말이라 생각한다. 생긴 대로 사는 거다.

● 행동하는 인문주의자

그는 행동하는 인문주의자다. '행동'은 환경보호론자의 당연한 귀결이고, '인문'은 우리말 사랑의 결과다.

현재 그는 낙동강보존회 부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학술대회나 걷기 운동 등 대중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1991년 페놀 사태 등 경남 지역의 환경 현안에서는 시위대의 전위를 지켰다. 그에게는 운동의 마지노선이 있다.

"여타 환경단체와는 달리, 관(官)과는 절대 관계 안 합니다." 나라를 들끓게 한 대운하 계획을 두고 그는 "'망가(만화) 같은 짓, 택(턱)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30년째 혼자서 해 오고 있는 순 우리말 미술 용어 만들기 작업은 또 다른 축이다. 북한에서 나온 것들을 포함해 국어 사전만 100여종을 모았다. 알록달록 촘촘히 밑줄 쳐져 있다. 정치가나 학자들이 우리 말을 버려 놓아, 정화 작업이 절실하다는 믿음이 굳건하다.

"뭣보다 내 생활이 바르게 돼요. 지식의 포로가 된 지식인이 아니라…." 진한 부산 사투리에 그런 생각이 얹혀 나온다. 그의 책장에는 틈틈이 조사ㆍ기록해 둔 낱말 카드 수천 장이 줄 지어 있다. 세 가지 없는 것이 있다. 핸드폰, 자동차, 컴퓨터.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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