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의 재임 시절 경호 암호명은 '낚시꾼(angler)'이었다고 한다. 그는 역대 부통령 중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2인자였지만, 공개석상에는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지병인 심장병에 시달린 건강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부시 행정부 8년간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대통령이 연임해 출마하지 못하면 부통령이 으레 집권당 대선 후보로 나서던 관례도 깨고 그는 부시 대통령과 함께 퇴장했다. 부통령 경호팀이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짓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이런 이미지는 강호(江湖)에서 고기를 낚는 낚시꾼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강호의 낚시꾼 닮은 체니
이랬던 그가 퇴임 후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가 부쩍 잦아졌다. 여러 방송과 신문에 겹치기 출연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쏟아내는 정책으로 바쁘게 돌아가던 TV 화면에 난데없이 등장한 체니를 보고 미국 시청자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치가 역력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체니가 현 정부에 대해 독설처럼 내뱉는 비난 발언이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의 정책, 특히 안보정책을 뒤집거나 비판할 때마다 반박하며 오히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더욱 위험하게 한다"고 맹공을 퍼붓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중앙정보국(CIA)의 수감자 강압신문 공개, 쿠바ㆍ베네수엘라 같은 반미 국가들에 대한 유화 외교 등 오바마의 대외 안보정책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퇴임 후 고향인 텍사스에서 '낮은 자세'로 있는 부시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 때문에 언론에서는 체니 부통령이 부시의 '방위 총사령관'이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체니의 주장은 간단히 말하면 부시 행정부가 제2의 9ㆍ11 테러를 막은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업적이라는 것이다. 9ㆍ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시기가 문제일 뿐 제2의 끔찍한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우려를 강력한 안보정책으로 불식시킨 부시 대통령을 오바마가 비판하는 것은 미국을 다시 위험에 빠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낚시꾼 체니의 등장을 놓고 미 정계는 논란이 한창이다. 주장의 시비를 가리는 것에서부터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이 정치판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체니를 옹호하는 측은 그가 대선 후보 티켓까지 양보한 점을 내세워 "정치적 욕심이 아닌 원칙과 양심에 입각한 발언"이라고 평가한다. 체니 부통령을 보좌했던 메리 머탤린은 "오바마 대통령이 해야 할 일들을 했다면, 체니는 자서전을 쓰거나 집안일을 돌보면서 편히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며 순수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부시 때문에 대선에 졌는데, 체니가 나타나 부시 망령을 상기시키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이 체니의 등장에 반색한 것은 당연했다.
체니와 노무현의 차이
TV 속 체니를 지켜보면서 검찰로 향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부통령과 대통령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전직 정부 최고위 인사가 정책을 놓고 현 대통령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TV를 통해 미국 국민이 체니를 보는 것과 한국 국민이 노무현을 보는 것의 차이는 곧 한국과 미국 정치의 수준차이가 아닐까 싶다.
황유석 워싱턴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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