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올드보이' 이후 5년 만에 칸 국제영화제를 찾은 박찬욱 감독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5년 전엔 모든 것이 어리둥절해서 무작정 상경한 촌놈 같았다"는 그는 그 사이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지난달 30일 '박쥐' 개봉 이후 한국 언론과의 만남을 한사코 사양해왔던 그를 프랑스 칸의 해변에서 만났다. 그의 답변은 여전히 막힘 없이 논리정연했고,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다.
- '박쥐'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극단적이다. 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내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박쥐'를 굉장히 친절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너무 불친절하다는 말이 많았지 않았나. '박쥐'는 흡혈귀 영화이니 어느 정도 폭력 장면을 받아들이리라 예상했다. 모두가 좋아하고 즐길 만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어떤 분들과는 소통이 안 된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당황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너무 싫고 역겹다는 분들이 난 밉지 않다. 내 영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는 것이니까. '그저 그러네' 혹은 '봐줄 만하네' 식의 반응이 오히려 실망스럽다. 내가 제일 싫어할 사람은 영화를 안 본 사람이다. 보고 나서 욕한다면 고맙다."
- 5년 전 '올드보이'와 비교하면 '박쥐'에 대한 칸의 반응은 어떤가.
"비슷한 듯하다. 당시에도 '올드보이'에 별점을 낮게 매긴 언론이 있었던 반면 흥분해서 인터뷰 요청을 했던 기자들도 많았다. 이번도 비슷한 상황이다."
- 칸 경쟁부분 진출만으로도 영광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래도 수상 욕심이 나지 않나.
"상 욕심은 물론 있다. '워낙 경쟁부문 진출 감독들이 화려해서 칸에 온 것만으로도 상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나의 발언은 결국 상을 못 받을 때를 대비한 핑계거리라 할 수 있다. '박쥐'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상현도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자꾸 핑계를 대려 한다. 그런 상현의 모습엔 내 성격이 많이 반영돼 있다."
- 외국 잡지 인터뷰에서 김기영 감독이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는데.
"1982년 대학 입학하자마자 본 첫 영화가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1960년 작 '하녀'를 리메이크한 '하녀 82'였다. 얼마나 놀랬는지… 한국에 이런 감독이 있는지,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한지 전혀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내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어정쩡한 마음만 있었지 결심은 못했었다. '하녀 82'는 내 마음 한 구석에 감독이 되고자 하는 씨를 뿌려준 작품이다."
- 영화제 때문에 흡혈귀 소재를 택했다는 시각도 있다.
"영화제가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제로는 내 생활이 해결되지도 않고, 나의 배우들과 투자자들에게 보답을 할 수도 없다. 더구나 많은 돈을 들여 영화제를 위한 영화를 기획하고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황당한 일이다. 흡혈귀영화는 잘 만들면 항상 흥행이 잘되는 영화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재미있게 즐길 만한 오락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물론 독특하게 연출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하겠나. 그럼에도 영화제를 위해서라는 지적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영화제에서의 호평과 수상은 수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칸에 오고 싶었고, 상을 받고 싶은 이유도 그게 가장 크다."
- 당신의 작품에 자주 출연한 송강호가 당신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 최소한 '박쥐'를 보면서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상현이라는 캐릭터에는 내 성격의 일면이 들어있다. '박쥐'를 보면 볼수록 송강호에 대해 남같지 않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 차기작의 소재나 내용은 정해졌나.
"아직 정해진 소재나 내용은 없다. 다만 생활에 밀착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 넓게 봐서 스릴러가 되겠지만 (판타지 성격이 강한) 흡혈귀는 이제 다뤄봤으니 생활의 감각을 유지하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만 지니고 있다."
칸=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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