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용 감독의 얼굴에는 서운하고 안타까운 표정이 역력했다. 한ㆍ일 합작으로 만들어져 상영 중인 '싸이보그 그녀'에 대한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이 기대 이하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곽 감독은 일본 영화계와는 사실상 생면부지의 충무로 토종 감독. 그럼에도 '싸이보그 그녀'는 일본에서는 드물게 만화나 소설 등 성공한 원작을 등에 업지도 않고 일본 평균 제작비(약 3억 5,000만엔)의 2배가 넘는 7억 5,000만원으로 만들었다. '엽기적인 그녀'에 반한 일본 영화계가 곽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출력을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싸이보그 그녀'는 SF와 멜로의 장르적 교배를 시도한 영화다. 먼 미래의 남자 주인공 지로(고이테 게이스케)가 엉뚱한 성격의 여자 사이보그(아야세 하루카)를 만들어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 목숨을 구하게 한다는 내용이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사람과 사이보그의 사랑 이야기가 살로 붙고 만화 같은 유머가 활력소 역할을 한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짐작했겠지만 '싸이보그 그녀'는 정서적인 면에서 '엽기적인 그녀'와 결을 같이 한다. 그뿐만 아니다. 엽기적인 그녀가 얼기설기 작성해 남자 주인공에게 내밀었던 3편의 시나리오 중 한 편이 '싸이보그 그녀'의 설계도 역할까지 했다.
"'엽기적인 그녀' 속 소나기 에피소드는 영화 '클래식'으로, 검객 이야기는 '무림여대생'으로 거듭났다. '싸이보그 그녀'를 마지막으로 '엽기적인 그녀'에 나온 시나리오들이 모두 실제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하여 '그녀의 시나리오 3부작'이라고 해야 할까."
기시감이라는 치명적 단점을 지녔음에도 '싸이보그 그녀'는 순정한 사랑과 추억에 대한 아스라한 묘사가 가슴을 울린다. 한국인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풍속,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영화적 재료로 삼은 점도 시선을 잡는다. 일본에선 볼 수 없는 버스 안에서 삶은 달걀을 먹는 모습과 옥탑방 생활, 1999년 발생한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가 등장한다.
우리 가요 '어느 작은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는 일본어 가사를 빌어 영화 속 배경이 되었다. "'싸이보그 그녀'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 관객을 위한 영화"라는 이유에서다.
"씨랜드 사건과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을 시간을 되돌려 막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을 담으려 했다. 지하철 화재는 일본에선 아예 불가능해 결국 뺐지만… 가요 '어느 작은…'은 한국어로 사용하려 했으나 반대가 아주 심했다. 한국 음악을 들으면 일본 관객들이 큰 충격을 받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결국 가사는 일본어로 바꿔야 했다."
'싸이보그 그녀'의 일본에서의 상업적 성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극장 관객은 70만 명. 실망스러운 흥행 성적이지만 DVD는 11만장이나 팔렸다. 그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일본에선 감독이든 배우든 예술가보다 장인이 되려고 한다. 우리와는 정반대다. 그들이 지닌 힘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장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일본 영화계에서 영화를 만들어낸 나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1989년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데뷔한 이래 그의 감독 인생도 올해로 만 20년. "'접속'과 '쉬리'를 보고 한때 크게 좌절했던" 그이지만 아직도 마음은 의욕으로 충만해 있다.
"'과속스캔들'을 보고 힘을 얻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영화가 크게 성공했으니까. 1980년대 초반 대학가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 '순수의 시대'를 준비 중이다. 영화 만들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뛰고 설렌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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