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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 든 노인들 "인생 2막, 큐!"/ 봄날은 가도… 영화 만들며 다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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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 든 노인들 "인생 2막, 큐!"/ 봄날은 가도… 영화 만들며 다시 보는 세상

입력
2009.05.13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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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서울노인복지센터 미디어교육실. A2 용지에 준비해 온 가족 사진을 붙이는 등 '나의 일대기'를 작성하는 어르신들의 손길이 바쁘다. 교사, 공무원, 보험사 간부, 문인협회 회원, 사진 기자 등 경력은 제 각각이지만 이들의 공통 관심사는 '영화'다.

노인복지센터와 영화진흥위원회 부설 영상교육기관인 미디액트가 노인 미디어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영상미디어반' 수강생들이다. 1, 2반을 합쳐 수강생은 모두 29명으로 막내가 65세다.

이날 수업 주제는 '다큐 영화의 기획'. "평소 영상에 담고 싶었던 소재를 말해보세요." 정소희(34ㆍ여) 강사의 말이 떨어지자 수강생들은 저마다의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어르신들이야말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영화 소재거리가 다양하다"는 임태리 사회복지사의 말 그대로다.

늦깎이 대학생 이정자(67ㆍ여)씨는 "서울 금호동 집에서 천안에 있는 대학까지 7시간 걸려서 등하교 하는데 그 과정을 다룬 '학교 가는 길'이 어떨까요"라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7년간 근무했다는 조용서(82)씨는 "이태원 이슬람사원을 비롯해 외국인 근로자들의 삶을 다루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담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지난해 먼저 떠난 아들이 생전에 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가져온 김서환(65ㆍ여)씨는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김성란(67ㆍ여)씨가 꺼내놓은 것은 '아버지의 생애'. 그는 "6ㆍ25 때 아버지가 수술을 받으셔서 잠시 고아원에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이를 잡아주고 간식도 사주셨다고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파란색 넥타이로 멋을 낸 최고령 수강생 엄규해(85)씨는 '효'를 다루고 싶다고 했다. 토양 오염, 길거리 시위단체, 책방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수강생도 있었다.

수강생 절반은 이미 다큐 영화 제작 경험을 갖고 있다. 반장 구용성(67)씨는 2005년 시작된 영상미디어반 원년 멤버다. "습작 수준"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5분짜리 다큐 '청계천의 원류를 찾아서'를 시작으로 지난해 처음 열린 노인영화제에 '꿈꾸는 예술단'을 출품하기도 했다.

올해 영화제 재도전을 위해 북촌 등 종로구 일대의 풍광을 담은 '서울의 재발견'을 제작 중인 그는 "좀 더 세련되게 만들면…"이라면서 입상 욕심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지난 세월들이 억울해서 영화를 찍게 됐다"는 손병환(74)씨가 지난해 만든 '가는 여름, 오는 가을'은 케이블 채널을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정식 감독으로 데뷔한 이도 있다. 지난해 노인영화제서 각본상을 받고 지난달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도 도전장을 내민 조경자(82ㆍ여)씨다.

수상작은 폐품 수집하는 할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꼬마 사장님과 키다리 조수'.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팔아 4남매 뒷바라지 하느라 변변한 여가생활을 누리지 못했지만, 한때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기본인 영화광"이었다. 서울 마포 옛 경보극장에서 본 '에덴의 동쪽'의 제임스 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격동기를 살아오느라 영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지만, 저마다 영화에 얽힌 추억 하나씩은 품고 있다. 우순자(76ㆍ여)씨는 "11세 때 고향 신의주에서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신문물 따라 퍼머를 했다가 소박 맞아 자살한 여자를 그린 영화를 봤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영화 만드는 과정은 어르신들끼리, 나아가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도 효자다. 이날 수업에서도 수강생들은 "IMF로 꿈 많던 인생 1막이 허망하게 무너졌지만 영화 수업을 계기로 인생 2막 회생기를 열겠다"는 다짐에 "잘 하셨다"며 박수를 보내는 등 서로를 아낌없이 격려했다.

김용철(83)씨는 영화 기획 덕에 "벌써부터 연애질 하는" 초등학생 손자와 사진을 찍으며 정을 나눴다고 했다.

아무래도 기기 다루는데 서툰 어르신들인지라 카메라 작동법이나 편집 기술 익히는데 가장 애를 먹는다. 올해 처음 수강한 안병균(75)씨는 "캠코더 설명서를 들여다 봐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노인들은 애써 익혀도 몇 개월 안 하면 또 까먹어 고민이다"고 했다. 이 때문에 수강생들은 영화 동아리를 자체적으로 꾸려 1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

어르신들은 영화를 완성했을 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첫 작품을 내놓은 이정자씨는 "기뻐서 졸도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처음 캠코더를 잡았을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한다는 조경자씨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 구석구석을 뒤늦게 알아가는 기분"이라고 즐거워했다.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들'은 이달 하순 영화 촬영 실습에 나선다. 하반기에는 팀을 꾸려 극영화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강사 정소희씨는 "어르신들이 자신의 유작이나 유산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매 수업에 혼신을 다하신다"고 했다. 평균 나이 73.5세. 늦깎이 '충무로 키드'들의 인생 2막은 이제부터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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