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비평준화 시절 서울에는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말이 있었다. 서울대에 합격자를 많이 낸 이른바 명문고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를 5대 공립, 중앙 휘문 보성 양정 배재고를 5대 사립이라 일컬었다.
지방도 광역시도별로 1,2곳씩 대표적인 명문고가 있었다. 서울과 지방을 합쳐 전국적으로 이런 명문고는 수십 곳 정도였다. 학생수로 따지면 전체의 1%를 조금 넘었다.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지 35년이 지난 지금, 명문고는 여전히 존재한다. 아니 늘었으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다. 일반고가 특목고와 자립형사립고로 대체됐을 뿐이다. 과학고, 외고, 국제고 등 특목고와 자립형사립고가 60곳이 넘는다. 학생수도 전체의 2.5%로 비평준화 시절의 두 배에 이른다. 말이 평준화지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평준화 해체 움직임은 더욱 두드러진다. 명문고가 모자라다며 앞으로 자율형사립고 100곳과 기숙형 공립고 150곳을 만든단다. 학교장에게 교육과정 편성에 재량권을 많이 줘 국영수에 치중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 게 자율형사립고며, 학생들을 먹이고 재우고 공부만 시키지 않을까 걱정되는 학교가 기숙형 공립고다. 이들 학교가 지어지면 전체 일반계고의 20% 이상이 '입시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는 셈이다.
명문고가 늘어나면 입시경쟁이 덩달아 치열해 지는 것은 자명하다. 입시경쟁이 과열되면 사교육비가 치솟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미 지금이 그렇다. 대한민국 초중고생 가운데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는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교육 혜택을 받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 국민을 사교육 중독증에 빠지게 만든 이명박 정부가 사교육을 잡겠다고 나섰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경쟁을 있는 대로 부풀려 놓고 사교육을 줄인다니. 마치 병주고 약주겠다는 식이다.
대학들이 내신 비중을 줄이는 대신 수능 반영을 높이고, 특목고 출신 학생들을 우대하고, 논술을 본고사처럼 변형해도 대입 자율화란 이름아래 묵과한 것이 누군가. 수능시험 성적을 공개해 지역ㆍ학교간 성적 차이를 노출시키고, 전국적인 일제고사를 치러 서열화를 유도한 게 이 정부 아니던가. 대입 전쟁도 모자라 고입 전쟁까지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그래 놓고 밤 10시 이후 학원 수강을 금지한다느니, 방과후 학교를 사설 학원에 맡긴다느니, 외국어고 전형방식을 바꾸겠다느니 호들갑을 떨고 있다. 암 세포는 그대로 놔둔 채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 치료하겠다고 하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니 청와대는 대안을 내놓고, 교육과학기술부는 안 된다 하고, 한나라당은 더 생각해봐야 한다며 배 따로, 사공 따로가 되는 것이다.
정부가 진짜 서민들을 생각해 사교육을 잡고 싶다면 모든 학생을 점수 경쟁으로 내모는 무한 경쟁, 정글식 경쟁체제를 완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입시경쟁과 사교육비 경감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교육을 잡으려면 대학입시와 고교입시 과열 경쟁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아예 사교육비를 경감시켜주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괜히 되지도 않을 일을 갖고 서민들 기대만 부풀리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린이들이 너무 공부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대통령의 약속을 들어야 하는 국민들은 괴롭다.
이충재 부국장 겸 사회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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