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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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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입력
2009.05.1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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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종일 바람이 불어 거기 아픈 사람들이 모래집을 짓고 해 지면 놀던 아이들을 불러 추운 밥을 먹이다

잠결에 그들이 벌린 손은 그리움을 따라가다 벌레먹은 나뭇잎이 되고 아직도 썩어 가는 한쪽 다리가 평상(平床) 위에 걸쳐 누워 햇빛을 그리워하다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아직도 나는 그들을 그리워하다 발갛게 타오르는 곤충들의 겹눈에 붙들리고, 불을 켜지 않은 한 세월이 녹슨 자전거를 타고 철망 속으로 들어가다

물과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벌레먹은 그리움이다 그들의 입 속에 남은 물이 유일하게 빛나다

● 고백하건대 이성복 선생의 시를 읽을 때만큼 시를 쓰고 싶은 때가 없었다. 좋은 시들은 독자에게 시를 쓰고 싶게 만든다. 위의 시는 <남해 금산> (1986)이라는 선생의 두 번째 시집에 들어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남해 금산> 은 7쇄, 1989년도에 서점으로 나온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시집을 일금 2,000원을 주고 샀다. 아마도 광화문이나 종로에 있는 큰 서점에서 샀을 것이다.

시내를 걷다가 낯선 서울 생활에 지쳐서, 울분에 뒤척거리다가, 혹은 이런저런 시사(時事)에 끄달리면서 우연히 들어간 큰 서점. 시집 코너에 꽂혀 있던 이 시집을 나는 내 일생의 어떤 서랍 안으로 데리고 왔다. '치욕의 시적 변용'이라는 김현 선생님의 해설이 붙어있었다. 아!, 그때 김현 선생님은 우리 곁에 계셨다.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감각과 감각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나온 듯한 이 시, 그리고 생애의 치욕이 감각으로 내면화될 때 우리는 '벌레 먹은 그리움'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에게는 저녁등이 명멸해가는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 이 시를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사실, 읽은 것이 아니라 이 시 속에서 살고 있었다.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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