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그는 '추리닝'(트레이닝복이 아니다) 차림으로 나타났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인터뷰 장소인 서울 삼청동으로. 사진기자는 "몰랐는데 꽃미남"이라고 했고, 인터뷰 전 시사회장 객석의 반응도 "직접 보니 잘 생겼어요"란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평범한 생활인'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정재영이다.
'실미도' '킬러들의 수다' 등 숱한 영화에서 폭력건달 역을 단골로 맡아왔지만, '김씨표류기'에서 우연히 밤섬에 표류하게 된 직장인 김씨 역이 그에게 가장 걸맞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밤섬에서의 촬영은 여러모로 경이적이었다. "새벽에 한강 선착장에 모여서 해병대가 타는 고무보트 여러 대에 나눠 타고 밤섬으로 들어갑니다. 한 번 들어가면 화장실은 못 가요. 밤섬이 생태경관보존지역이어서 밥도 못 먹거든요. 점심시간에 둔치로 나와서 밥 먹고 화장실 갔다가 다시 배 타고 들어가서 촬영하는 거죠."
밤섬 촬영 허가는 단 8회뿐이어서 정재영은 충주, 청원의 강변에서도 촬영했고, 제작진은 컴퓨터그래픽을 입혀 서울의 배경을 재현했다. "알고 보면 엄청난 CG의 영화"란다.
저 앞에 여의도 63빌딩이 보이고 유람선이 지나다니는 대도시 서울의 복판에서 표류자의 삶을 산다는 '김씨표류기'의 설정은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엔 황당하다. 그러나 정재영은 "실제로 밤섬에서 보면 김씨의 감정이 리얼해진다"고 말한다. "유람선 소리가 들리기나 하나요.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무심한 서울이고, 해가 지면 철새만 날아들어요."
정재영은 서울예대 졸업 후 대학로에서 연기를 시작한 연극배우 출신이다. 1996년 이후 '허탕' '라이어' 등 주로 장진 감독의 연극에 출연했다. 경제적으로 쪼들렸지만 "1만원으로 1주일을 버티며 고통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여름에 수박, 크리스마스철에는 카드를 떼어 팔면("찹쌀떡은 잘 안 팔린다") 시간당 수입은 월급쟁이보다 나았고 남는 시간엔 연극도 할 수 있었다.
"약간의 동정심을 자극할 줄 안" 그는 장사에 천부적이었다. 아내에게는 "서른다섯까지만 해 보다 안 되면 말게"라고 했지만 연극을 때려치울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이름을 널리 알린 흥행작 '신기전'이 아닌 데뷔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이다. 불량배 역할에 단 두 장면, 대사 다 합쳐봐야 두어 줄에 불과했다.
"대사를 알아서 좀 다듬어서 하라"는 김태균 감독의 지시에 그는 나흘을 고심했다. 결국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대사가 튀어나오자 감독의 눈은 커졌는데, 상대역이었던 안성기가 "재미있다"고 호응하는 덕분에 그의 연기는 살아났다.
어렵던 시절이 있었기에 "김씨처럼 고작 수천만원 빚에 자살할 생각은 결코 안 한다"지만 영화 속의 촌철살인 내레이션에는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고장 난 오리배를 집으로 삼으면서 기쁘게 "주택부금 7년 만에 내 집을 장만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부분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너무나 좋아서 "송강호 형한테 가야 할 게 나한테 잘못 온 거 아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는 것. 사실 송강호는 그가 대학로 시절부터 좋아했던 배우다.
"'조용한 가족'에서 처음 만났고 그 뒤로 친하게 제가 많이 따랐죠. 그런데요, 정말 치사해요. '형은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거야'라고 몇 번을 물어봐도 '그냥 대충 하는 거야'라며 절대 이야기 안 해줘요. 자기만 오래 하려고 말야."
■ 리뷰/ 영화 '김씨표류기' 대도시서 각각 고립된 남녀의 희망찾기
이해준 각본ㆍ감독, 강우석 제작의 '김씨표류기'는 상징과 은유의 영화다. 대도시 한복판의 무인도 밤섬에 표류한 남자 김씨와 3년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하는 외톨이의 삶을 사는 여자 김씨(정려원).
그들은 스스로 고립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치열한 경쟁사회의 낙오자들이다. 남자 김씨가 한강에서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꼴깍꼴깍 수면을 오르내리며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얼굴에 흉터를 가진 여자 김씨는 '복사하기'와 '붙여넣기'로 인터넷에서는 화려한 삶을 산다.
그러나 어두운 삶을 그들에게만 책임지게 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풍자하는 그들의 독백이다. "쉽고 빠른" 대출 끝에 자신의 삶을 궁지로 몰리게 만든 신용카드로 새똥을 긁어내며 남자는 "간만에 카드 긁는다"며 웃는다.
자장면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남자는 "내 인생에서 자장면을 거부했던 숱한 오만과 독선을 반성한다"고 내레이션을 한다. 영화는 결국 두 남녀가 고립된 삶을 버리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희망을 그린다.
정재영의 심한 노출에도 불구하고 12세 이상. 14일 개봉.
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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