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나왔던 대정부 질의응답의 한 장면을 보니, 과학기술인의 한 사람으로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의 과학기술 행정 컨트롤 타워 부재와 기초연구 투자의 미흡함을 추궁하던 한 국회의원의 질문에, 국무총리의 답변은 너무도 태평하게 일관되었던 것이다.
그 요지인즉, "기초과학이 중요한 건 사실이고 우리도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좋겠지만, 기초, 원천 부문의 연구는 아직 역부족이다. 우리의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기초과학의 연구결과는 선진국에서 가져와서 응용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옳고, 또 그런 방식으로 해서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잘 해오지 않았느냐?" 는 것이었다.
총리의 답변이 피상적으로 얼핏 보면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정부 행정 전반과 내각을 총괄하는 분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이하다 못해 지극히 우려스럽다. 한마디로 하자면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얘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닌 이는 예전에도 있었으니, 대표적인 예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그는 주로 무역을 통하여 기업을 일으킨 탓인지, '기술은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된다'는 독특한(?) 경영 철학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의 다른 자동차 기업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독자 엔진을 개발해내고, 경쟁 전자회사들은 무모해 보일 만큼 거액의 비용과 연구개발 인력을 쏟아 부으며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고 신기술의 가전제품들을 선보였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한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면서 호기롭게 장담하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이 결국 국민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떠안긴 채 공중 분해되는 운명을 맞았던 것도, 그룹 총수의 그와 같은 그릇된 기술관에도 상당 부분 원인과 책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자체 연구개발만을 고수하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닐 수도 있으며, 때로는 기술을 사오는 것이 더 유리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수출주도형 제조업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기 시작한 무렵에는 기술도 인력도 없던 시절이니, 외국으로부터의 기술 수입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그 후로는 기술 도입에서 기술 제휴와 용역 개발로, 그리고 자체 연구개발을 차츰 늘리는 방식 등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설령 지금까지는 우리나라가 응용기술과 제조업 부문의 양산기술에 치중하여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추격형' 과학기술 발전 전략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극히 미지수이다. 이미 '돈을 준다고 해도 기술을 사올 수 없는' 경우를 자주 접했고,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세계적으로 가속화될 것이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한때 환율 덕택에 2만 달러에 근접했던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이, 원화 가치 하락으로 다시 1만5,000 달러 아래로 밀렸을 뿐 아니라, 향후 몇 년 간은 다시 2만 달러에 재진입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2만 달러 국민소득이 선진국의 충분 조건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선진국에 끼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물며, 정부의 고위 관료나 오피니언 리더들이 기초 연구와 과학기술에 대한 안이하고 잘못된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진국 진입은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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