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인생을 바꿀 수는 없어도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 줄 수는 있다. 내게 그런 행복을 가져다 준 책은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이다. 대학 입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84년 겨울에 인천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 몽상의>
그때의 나는 서정인의 소설 '강'에 나오는 주인공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골 천재가 수재로, 그리고는 마침내 둔재로 변모해버리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도시에서 성장하면서 점차 좌절과 고독 속으로 빠져들던 내 청춘의 행로와 거의 비슷했다. 가방 속에 체인을 넣고 다니거나 본드를 부는 도시 변두리의 아이들 틈에서, 나는 지긋지긋한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던 시골 수재에서 고향의 안온한 품이 그리운 도시 둔재로 둔갑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드센 도시 변두리 아이들을 피해 빛이 들어오지 않는 단칸방으로 도망쳐 고독 속에서 끝도 없이 호떡을 만들었다. 그나마 도시로 올라온 가족이 고향을 대체해 줄 위안거리였다. 푸른 작업복에서 기름 냄새가 나는 형과 재봉일을 하느라 옷에 실밥을 묻히고 밤늦게 돌아오는 누이를 위해 놀래켜 줄 선물이란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그런 내가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을 만나지 못했다면 시를 쓰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마 시를 썼다고 해도 내가 꿈꾸는 세계를 그리지 못했으리라. 가난한 유년기의 체험과 변두리의 소외된 풍경이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거의 깨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상의>
나는 언어로 숨을 쉴 수 있음을, 가난과 추억은 인생의 감옥이 아니라, 그러한 낡고 누추한 세계도 얼마든지 언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갯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자가 부인과 사별 후, 손수 부엌의 불을 지피며 현실의 고통을 몽상을 통해 행복의 원천으로 바꿔나가는 이 연금술적인 책이 가난한 시골 출신 소년을 시인으로 만든 것이다.
책의 첫장을 열면 '나의 딸에게'라고 쓰여 있는 것도 얼마나 마음을 설레게 했는지. 그때 가난한 문학청년은 나중에 시인이 되면 이 촌철학자처럼 고독 속에서 딸을 키우며 차가운 세상의 아궁이에 따스한 몽상의 불을 지피고 싶다는 낭만 속에서 행복에 겨워하기까지 했으니….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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