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구박으로 하루 종일 굶은 박순구 역의 좌운국(70)씨가 서러움에 눈물을 훔치자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님은 밖에서 돈이나 벌어 오세요!" 며느리 역을 맡은 한순자(68)씨의 앙칼진 목소리에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들은 "저런 나쁜…"이라며 울분을 참지 못한다.
"어머니, 할아버지에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고등학생 교복 차림으로 무대에 나온 신국남(66)씨의 속 시원한 말 한 마디에 관객들은 "옳소"를 연발한다. 공원 벤치에서 "구구구" 하며 비둘기를 불러모으다 말고 먼저 간 아내의 사진을 꺼내보며 목 놓아 우는 박순구. 객석의 흐느낌 소리가 더 높아진다.
노인 학대 문제를 다룬 30분짜리 창작극 '박 노인네 가족 이야기' 공연 모습이다. 퇴직 교사 10명으로 꾸려진 제주 '빛누리 실버연극단'이 지난해 15차례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려 노인 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인 공로로 어버이날인 8일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단원 대부분은 40여년 이상 교단을 지키다 퇴직 후 '금빛평생교육봉사단'을 꾸려 봉사활동을 해왔다. 이들은 2007년 8월 제주도 노인보호전문기관이 노인들이 직접 연극을 통해 노인 학대 문제를 다뤄보자며 창단한 '빛누리 실버연극단'에 발을 들여 연극배우로 변신했다.
이들은 첫 무대에 서기까지 6개월 동안 매주 2회 이상 맹연습을 거쳤다. 연습 시간만 72시간30분. 이후 지난해 2~8월 7개월간 제주도 내 양로원, 복지관, 노인대학 등을 돌며 모두 15차례 공연을 했다. 이들의 연극을 본 관객은 모두 1,145명에 달한다.
난생 처음 무대에 선 실버들의 모험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워낙 무거운 주제를 다루다 보니, 대본 내용부터 의견 합일이 쉽지 않았다. 남편 역을 맡은 김평일(67)씨는 "솔직히 초반만 해도 연극은 무슨 얼어 죽을 연극이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평범한 대본을 받고 나니 오히려 오기가 생겨 열심히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작가, 연출가, 단원 간 의견 차이로 대본은 탈고 순간부터 수차례 각색이 이뤄졌다. 결국 초고에 없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등장 인물의 성별이 바뀌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이광후(58) 극단가람 대표는 "교육을 하던 분들이라 전문 연극인들보다 개성이 더 강해서 그런지 대본을 받는 순간부터 옥신각신 해 머리가 '띵' 했다"면서 "선생님들의 서툰 연기 때문에 많이 웃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추운 겨울에도 빠지지 않고 매주 2시간 이상 연습에 매진했다. 서로 연기나 발성에서 미흡한 부분을 지적해주며 격려했다. 처음으로 '화장'이란 걸 하게 된 할아버지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배꼽 잡고 웃으며 긴장을 풀기도 했다.
선발 과정부터 이들을 지켜본 양은경 노인보호전문기관 연극담당 상담원은 "어르신들이 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곳에서 어찌나 열성적으로 연습을 하는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단원들은 지난해 2월29일 요양원에서 공연한 첫 무대를 잊지 못한다. 공연 전날 최종 리허설을 마친 단원들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잘 할 수 있어"라며 격려했다.
갈등 끝에 가족이 화해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을 마친 뒤 단원들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들은 "잘 하고 못 하고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첫 무대를 큰 실수 없이 끝냈다는데 안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평일씨는 "첫 무대를 앞두고 마지막 대본 연습을 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서툰 공연을 보고 할아버님 할머님들이 훌쩍거리며 박수를 쳐주셔서 내가 오히려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경로 전도사'로 나선 이들은 연극을 통해 스스로도 행복해졌다. 연극을 끝내고 단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만족도가 70% 이상 올랐다. 오순금 제주도 노인장애인복지과 계장은 "문화 접근성이 낮은 어르신들에게 문화 혜택을 드리고 노인 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연극단을 만들었는데, 단원들도 매우 흡족해 하신다"고 말했다.
성공리에 임무를 완성한 '빛누리 실버연극단' 1기에 이어, 2기생들이 7일 발대식을 가졌다. 2기 단원은 2대1의 경쟁을 뚫은 시인, 농민, 주부, 관광업자, 퇴직교원 등 남성 3명, 여성 4명. 평균 연령 67세인 이들은 8월까지 연습을 마치고 9월부터 월 3회 이상 찾아가는 공연을 펼친다.
연극 무대에서 며느리의 고성이 지금도 귓가에 들린다는 1기 단원 한순자씨는 "아버님이 앉았던 쓸쓸한 공원의 벤치 위에 내일은 내가 앉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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