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여권 최고 수뇌부의 '친박 원내대표' 카드를 일언지하에 내치면서 여권이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당분간은 박 전 대표의 진짜 속내가 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등을 놓고 설왕설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전 대표가 6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방문 중에 사실상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을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당헌ㆍ당규 위반 문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하는 국정운영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의중이 분명하게 읽힌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측근인 이정현 의원을 통해 친박계 좌장격인 김무성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과 관련, "당헌ㆍ당규를 어겨가며 그런 식으로 원내대표를 (추대)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당헌ㆍ당규상 원내대표는 의원들의 자유투표로 선출토록 되어 있는 데다 이미 출마를 선언한 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을 타의에 의해 주저앉히는 식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 전 대표 측은 트레이드 마크인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편법적으로 친박 인사를 고위당직에 앉히는 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건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취지다. 이 의원은 17대 총선 당시 박 전 대표가 '차떼기'와 '탄핵역풍'을 정면돌파했던 점을 거론하며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혁신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원칙을 버린다면 국민이 받아들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 측에 대한 불신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직설적 표현은 없었지만 '친박=원칙 대 친이=편법'이라는 등식을 공식화함으로써 친이 진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 준 셈이다. 박 전 대표가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는데도 이 대통령과 박희태 대표가 쇄신과 화합을 명분 삼아 내민 회심의 카드를 일언지하에 뿌리친 건 다른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박 전 대표는 앞으로 일정 기간 MB정부에 발을 담그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 측근 의원은 "이 대통령과 권력 핵심부가 열린 자세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 친박 인사 몇 사람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민심을 얘기했지만 친이 측과의 차별화를 통해 여당 내 야당으로 존재하는 게 더 낫다는 얘기다.
경우에 따라선 아예 등을 돌릴 수도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한다. 다른 측근 의원은 "김무성 카드를 고려했다면 박 전 대표의 의중부터 파악하는 게 순서 아니냐"고 했다. 여전히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꾸 이러면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방선거 공천 경쟁이 본격화하면 '미래권력'이 힘을 갖게 될 테고, 그러면 이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져들 것이란 일종의 경고다.
샌프란시스코=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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