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두 번 꼴로 아내와 함께 대형 할인점을 찾는다. 대개 구입 품목을 적어가지만, 그 대로 사는 경우는 드물다. 싸고 질 좋은 물건이 많다 보니 과소비의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문명에 대해 "불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게 이해가 된다. 요즘 할인점은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니다. 각종 식당과 영화관 전시관 등을 두루 갖추고 놀거리, 볼거리, 먹거리를 제공한다. 휴일이면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심심찮게 눈에 띌 정도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재래시장이 있지만, 목 달린 닭 따위의 제수나 혐오식품(?)을 찾을 때 외에는 거의 외면하게 된다. 예컨대 피순대와 눌린 머릿고기, 내장 등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걸칠 때다. 이런 종류는 재래시장이 푸짐하고 맛도 특별하다.
하지만 대다수 품목은 할인점 못지않게 싸긴 해도 질은 떨어진다. 가격이 싸다 보니 중국산을 속여서 팔 것이라는 의심마저 든다. 주차장이 없을 뿐더러 주변 환경도 불결하다. 동네 슈퍼를 찾는 경우도 드물긴 마찬가지다. 쓰레기 봉투나 라면 따위가 급히 필요한 경우에만 간혹 들른다. 제품의 신선도나 가격, 서비스 등 어느 것 하나 할인점보다 나은 게 없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1년간 연수할 때도 할인점 코스트코(Costco)를 자주 이용했다. 하지만 여기서 사는 품목은 주로 가공식품과 공산품이었다. 채소나 과일, 생선은 동네 가게를 이용했다. 코스트코의 생선 매장이 새벽마다 맨해튼의 어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을 실어오는 동네 생선가게를 이기기엔 역부족이다.
그로서리(Grocery)로 불리는 동네 슈퍼마켓 역시 채소ㆍ과일의 종류나 신선도가 할인점을 압도했다. 할인점의 '푸드코트(Food Court)'에서도 피자나 일본식 철판요리 등을 팔지만, 어디까지나 허기를 때우기 위한 싸구려 음식에 불과하다. 동네에서 수십 년간 터를 잡고 파스타나 해산물 요리 등을 전문으로 해온 레스토랑을 따라가진 못한다.
우리 동네 점포들은 뉴욕과 같은 경쟁력이 없다. 질과 서비스로 승부하기엔 규모가 너무 영세하고, 가게 수가 많아 경쟁도 훨씬 치열한 탓이다. 한마디로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설상가상으로 유통 공룡들이 골목 상권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롯데유통과 삼성테스코에 이어 할인점 업계 1위 이마트가 최근 330㎡(100평) 규모의 소형점포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다. 더 싸고 좋은 상품을 공급할 능력이 있는 대형 유통 업체들이 두부 한 모, 껌 한 통까지 싹쓸이 하겠다고 나서니, 가뜩이나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 상인들은 죽을 맛이다.
골목 상권을 살릴 수 있는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선진국의 3배 수준인 점포 수를 줄이고 규모를 키워야 한다. 문제는 자영업에서 퇴출되면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제조업 위주의 산업구조로는 더 이상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힘든 상황이다. 결국 서비스산업의 비중을 키우는 게 필수적이다. 교육, 의료, 금융, 레저, 관광 등의 선진화가 시급한 이유다.
영세 점포들의 경쟁력을 키우려면 소상공인과 신규 창업자에 대한 적극적인 금융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또 한시적으로라도 유통 공룡의 골목 상권 진출을 막을 수 있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번 국회에는 대형마트 규제 및 지역상권 균형발전 법안이 7건이나 발의돼 있다고 한다. 이제라도 자영업 문제의 근본적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자영업의 위기는 서민경제의 몰락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재학 경제부 차장 goindo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