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바이러스이자 악의 근원"이라며 세계적 종교논쟁을 촉발시킨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 의 저자)처럼 현대의 가장 치열한 논쟁은 진화론에서 샘솟는다. 한국일보 특별기획 '다윈은 미래다'는 3부 '해외 석학 인터뷰'에서 세계적 진화론 학자들을 직접 만나 지성의 향방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파헤친다. 이기적>
도킨스를 비롯, 사회생물학의 대부인 에드워드 윌슨, <빈 서판> 을 쓴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갈라파고스의 산 증인 피터ㆍ로즈메리 그랜트, 의식의 본질에 도전하는 철학자 다니엘 데넷을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함께 찾았다. 한국언론재단이 후원했으며, 6일부터 주1회 5회 동안 연재된다. 빈>
■ "36년간 갈라파고스 생태계 추적…자연선택론 증명 성과"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대에서 피터ㆍ로즈메리 그랜트 명예교수 부부를 만난 것은 그들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4월 중순이었다.
올해도 어김없는 갈라파고스 행은 36년째. 상상을 초월한 장기관측자인 그들은 진화의 산 증인들이다. 점심을 함께한 교내 식당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수학자 앤드루 와일즈를 마주치는 프린스턴대. 그랜트 부부는 이곳에서 소박한 노부부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진화론 첫 수업에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다윈은 갈라파고스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표본을 채집한 뒤 나중에야 깨달았고, 데이비드 랙(1930년대 갈라파고스를 방문, 경쟁관계인 종들이 같은 지역에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영국 조류학자)은 단편적인 묘사를 했고, 그랜트 부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두 분이 갈라파고스 핀치 새에 작정하고 달려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피터 그랜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우리는 몇 가지 기초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종간 경쟁의 결과 현재와 같은 진화가 나타났느냐'는 거였죠. 다윈은 그렇게 주장했지만 상당한 비판에 시달렸던 문제였습니다.
결국 우리와 다른 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증명됐죠. 또 다른 이유는 '왜 개체군마다 변이의 폭이 다르냐'는 거였습니다. 나는 다윈의 핀치가 두 문제를 푸는 데 제격이라고 봤어요.
더구나 로즈와 나는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다양한 생물종들로 가득 차 있는지 궁금했는데, 갈라파고스는 비교적 단순한 환경에서 종 분화가 많이 일어났기에 이상적인 연구지였죠.
▲최= 갈라파고스 8개 섬 중에서도 왜 하필 대프니 섬입니까.
▲피터= 첫 해에 5개 섬에서 핀치 새에 밴드를 달고 다음 건기 때 돌아가보니 4개 섬에는 표시를 단 새가 5%밖에 안 되는데 대프니에는 85%가 그대로 있지 뭡니까.
▲최= 우와! 저는 14년째 서울대 캠퍼스에 서식하는 까치를 연구하는데 표식을 단 까치의 80~90%가 매년 사라집니다. 이름표를 달고 우리 전화번호와 웹사이트도 적어두지만 연락이 많지는 않죠.
▲로즈메리 그랜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대프니는 가운데에 높이 120m의 화산 분화구가 있고 지름이 750m에 불과한 작은 섬이죠. 섬 전체를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어요. 작고 고립된 섬이어서 새들이 섬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최= 신이 만든 실험실이군요.
▲피터= 문제는 그 실험이 아주 느리다는 점입니다. 실험을 하는 분자생물학자들에게 1주일은 현장 생물학자에겐 1년이나 마찬가집니다. 실험은 잘못되면 다음 주에 하면 되지만 우리는 1년을 기다려야 하죠.
▲최= 갈라파고스군 도가 뭐가 특별하기에 자연선택 이론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갈라파고스를 가지 않았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달라졌을까요.
▲피터=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윈은 아프리카 옆의 베니 아일랜드도 갔었는데, 남미 대륙 옆의 갈라파고스처럼 화산섬이었고 생태학적 조건이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두 섬의 생물종은 서로 닮지 않았고, 오히려 각각 인접한 대륙과 비슷했죠. 다윈은 대륙에서 섬으로 생물이 이주했다고 감을 잡기 시작했고 갈라파고스 항해를 전후해 종이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는 개념을 인식한 겁니다.
즉 처음에는 섬의 생물들이 대륙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나중에는 섬마다 생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깨달았습니다. 물론 모든 생물체가 진화한다는 개념을 낳는 데에는 후자가 결정적으로 중요했지만요.
▲최= 36년 간 갈라파고스를 관측하면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을 꼽는다면요.
▲로즈=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죠. 우리는 그러한 진화가 때로는 이쪽 방향, 때로는 저쪽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실제로 추적했습니다.(그랜트 교수는 극심한 환경 변화를 전후해 핀치 새의 부리가 진화적 변화를 겪은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7년 최악의 가뭄으로 대프니의 땅핀치는 85%가 죽었는데 살아남은 땅핀치의 부리는 죽은 새들보다 평균 5,6%가 컸다. 불과 0.5㎜의 차이였지만 핀치에게는 큰 씨앗을 깨먹어 생존을 가능케 한 결정적 적응이었다.
반대로 큰 비가 내린 1983년에는 작은 씨앗이 풍부해 작은 부리를 가진 새들이 유리해지면서 핀치의 부리가 평균 2.5% 작아졌다. 이 발견은 진화가 막연한 추정이 아닌 엄연한 사실임을 보여 논란을 잠재웠고, 또한 진화의 방향이 무작위적임을 증명했다)
▲피터= 진화적 변화란 때로 아무 일 없다가 때로 환경이 급변하면서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장기 연구의 장점이 그런 겁니다. 2003, 2004년 가뭄으로 먹이경쟁이 심해졌을 때 우리는 중간 크기 땅핀치인 포르티스가 비교적 최근(1982년) 출현한 큰 땅핀치 매그니로스트리스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관측했습니다.
포르티스의 개체 수는 줄었고, (포르티스는 매그니로스트리스와 경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부리 크기가 작아져) 두 종의 격차는 더 벌어졌습니다. 그 2년 반 새 가장 특이했던 변화를 보기 위해 32년이 걸린 겁니다.
▲최= 만약 엘니뇨 같은 기후변동이 없었다면 놀라운 발견도 하지 못했겠네요.
▲로즈= 1983년 50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 한 엘니뇨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기후변동이 그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 그 때 폭우로 섬의 환경이 극단적으로 바뀌었고, 우리에겐 아주 운 좋은 일이었죠.
▲피터= 정도의 문제입니다. 다른 연구자들도 새나 포유류 등에서 진화의 증거를 찾아냈지만 변화가 미미하고 보통 시간간격을 알기 어려웠죠. 우리 연구는 애매한 구석이 전혀 없이 명쾌한 증거라고 할 수 있어요.
▲로즈=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순수한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갈라파고스 핀치 새는 인간 행동이 간여하지 않은 자연적인 적응방사(생물군이 환경에 적응하면 형태ㆍ기능적으로 분화하는 것)의 사례예요.
다윈은 우리가 어떻게 종 분화를 볼 것이냐고 지적했는데, 그가 염두에 둔 것도 200만~300만년 동안 핀치 새가 13종으로 분화한 것과 같은 '젊은 적응방사'(짧은 시기에 적응방사가 이뤄지는 것)였습니다.
▲최= 30여년 전과 최근 갈라파고스에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피터= 사람이 늘었습니다. 거주자도, 방문자도요. 자동차도 수없이 많죠. 그런데 관광객은 섬의 정해진 지역만 둘러보고, 섬 안에서 음식 물 담배 등이 일체 금지돼 있고, 잠도 배에서 자는 등 엄격히 통제되고 있어서 인간 활동이 섬의 생태에 끼치는 영향은 극히 적은 것 같습니다.
▲최= 우리 실험실은 최근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는 야생 긴팔원숭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원숭이들은 나무를 타고 위에서 도망치고, 우리는 숲을 헤치며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독한 한국인 아닙니까. 6개월이 지나니까 원숭이들이 체념하고 우리가 가까이 가도 상관 않더군요.
자료를 모은 지 2년이 가까워 내년이면 첫 논문이 나올 것 같습니다. 노벨상 운운하는 사람들은 비웃을지 모르지만 저는 엄청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과학자가 야생의 영장류를 연구한 사상 첫 논문이 될 테니까요. 끝으로 좀 거창한 질문을 하죠.
▲피터= 생물체란 무엇인가?(모두 웃음)
▲최= 현대인에게 다윈 진화론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피터= 생각이 열린 사람들에게 진화론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체를 설명하는 이론이 있기에 우리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 피터ㆍ로즈메리 그랜트 부부/ 핀치새 부리 진화 '포착'
피터ㆍ로즈메리 그랜트 부부는 1973년부터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관찰연구를 수행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핀치새의 부리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포착한 그들의 연구는 다윈 이후 자연선택론에 대한 오랜 의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갈라파고스에 인이 박혀 은퇴를 못한다"는 그들. 하기야 어린 자녀까지 갈라파고스에서 키우며 연구를 했던 부부 아닌가. 실제 만나본 그들에게서 가장 부러운 것은 평생 함께 일하며 학문적 열정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피터 그랜트는 사진 포즈를 취해달라는 부탁에 선뜻 부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점심 식사량이 너무 많아 쩔쩔매던 최재천 교수가 "접시 하나는 나의 선택이었지만"이라고 말하자, "그럼 다른 접시는 집단 선택이었소?"라고 응수하는 등 끊임없이 유머를 풀어놓았다.
◆피터 그랜트
▲1936년 영국 출생 ▲플로리다주립대 생물학 박사 ▲현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로즈메리 그랜트
▲1936년 영국 출생 ▲웁살라대 생물학 박사 ▲현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프린스턴=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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