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의 호수를 찾아 캄캄한 새벽에 길을 나섰다.
지난해 전남 화순 세량제의 새벽 풍경이 준 감동에 한동안 허우적거릴 때 누군가로부터 충남 서산에도 그런 어여쁜 저수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느 저수지인지 이름을 몰라서, 지도를 펼쳐놓고 그럴 것 같은 산 중의 저수지를 하나씩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딱 세량제의 분위기와 비슷한 저수지 사진이 떠올랐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과 개심사 사이에 있는 용비저수지였다.
그리고 1년을 기다렸다. 산벚꽃 흐드러지고 신록이 곱게 물드는 때에 맞춰 그 곳을 찾아 떠났다.
초행길의 안내를 내비게이션에만 의지한 게 불찰이었다. 목적지가 2km 남짓 남았다고 표시된 곳에서 철문에 가로막혔다. 철문 옆에 자동차 여러 대가 서 있길래 그 옆에 차를 대고는 앞선 이들을 좇았다.
그들을 따라 철조망을 넘어 목장의 능선 위로 한참 올라간 후에야 그들과 나의 목적이 서로 달랐음을 알았다. 이제 한창 돋기 시작한 산나물을 채취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비탈에 서 나물을 뜯느라 정신없는 그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능선을 올랐다. 풀밭의 이슬로 양말까지 푹 젖도록 이리 저리 헤맸지만 호수는 쉽게 보이질 않았다. 풀만 가득한 구릉의 곡선도, 초록의 빛도 고왔지만 급한 마음엔 그걸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높은 능선 위로 올라섰을 때 저멀리 작고 예쁜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방 위에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용비저수지였다.
다시 차 있는 곳까지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와 지도를 펼쳤다. 멍텅구리 내비게이션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용비지 입구 마을에 들어서 농로를 여러 번 헤집고서야 저수지의 제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미 사방은 훤히 밝았지만 다행히 아침 해는 아직 산 너머에 갇혀 있었다. 맑고 고요한 호수 위로 물안개가 넘실거리며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산벚꽃이 그새 많이 졌다. 끝물인가 보다. 겨우 한두 그루에서만 흰 꽃이 부수수했다. 대신 신록이 호수를 가득 두르고 물 속에 아기 연둣빛을 풀어내고 있다. 겨울 가뭄이 심했지만 이 저수지는 그래도 물을 많이 가두고 있다. 바리캉 치듯 드러난 호숫가의 뻘건 맨 땅이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호수. 귀에 들리는 건 이제 막 잠을 깬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찰칵 찰칵 터지는 카메라 셔터 소리 뿐이다. 이따금 한 번씩 들리는 셔터 소리는 오히려 호수의 정적을 더욱 깊게 만든다. 카메라를 맨 이들은 서로 눈으로만 인사할 뿐 말을 섞지 않고 호수만 응시했다.
용비지는 화순 세량지와 비교해 송전철탑이나 무덤이 없어 전경이 깔끔하다. 일부러 프레임에서 잘라내야 할 풍경의 군더더기가 없다.
해가 막 능선 위로 솟기 시작했다. 빛을 받은 물안개가 요동을 친다. 하루 중 가장 급박하게 사물이 바뀌는 순간이다. 해의 빛이 달라지고 그 빛을 받는 신록의 빛도 달라진다.
물 위의 안개가 사그라지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입에서 녹는 솜사탕처럼 물안개는 호숫물에 젖어 들었다. 수면에선 물고기가 튀어 오르며 동그란 파문을 그려댔다.
사진을 찍던 이들이 하나둘 카메라를 접고 자리를 뜬다. 모두가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온전히 나만의 호수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맨 몸을 드러낸 호수는 물안개 대신 눈부신 봄볕을 튕겨내며 눈을 어지럽혔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에서 나와 64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개심사, 해미 방향으로 달리다 운신초등학교를 지나 개심사길로 갈라지는 사거리 직전 마을로 좌회전해 들어간다.
마을회관 앞에서 11시 방향으로 난 농로를 따라 직진하면 고속도로 밑 작은 터널을 만난다. 터널을 지나 좌회전해 계속 길을 따라가면 용비지 입구 제방이 보인다.
서산=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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