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후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 야트막한 야산을 깎아 터를 잡은 마을에 오르자, 봄바람을 타고 송진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소나무는 없고, 고풍스러운 한옥 18채가 층층이 들어서 있다.
걸음을 옮겨 대문 없는 집 마당으로 발을 들였다. 봄볕에 잘 데워진 툇마루에 앉아 두릅을 손질하던 칠순 노부부가 "한옥에서 나는 향기가 좋지 않느냐. 여기가 행복마을이다"며 반갑게 맞았다. 지은 지 8개월 됐다는 그의 집 처마 서까래와 나무기둥 곳곳에는 송진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했다.
지금이야 소나무향과 흙내음이 배어나는 고즈넉한 '행복마을'이지만, 3년 전만해도 이 곳은 볼품없는 산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5가구에 30명도 채 안 되는 주민들이 우중충한 슬레이트 집에서 밭을 갈아먹고 살았다고 했다.
"이 곳에서 더 살아야 하나" 속앓이 하던 주민들은 결국 수를 냈다. 작년 여름, 주민들은 사람들이 자꾸 동네를 '거시기(떠나고)' 해서 '거시기(한옥 짓기)'에 나섰다고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관에서 한옥을 짓는 주민들에게 보조금을 대준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마을이 사라질 판인디 못할 게 뭐냐 싶었지라. 첨엔 괜한 짓 한다 싶었는디, 한옥이 한 채 두 채 들어서고 길도 새로 난께, 이사 온 사람도 늘고 아주 살만 해집디다."(이재용씨)
남도의 시골 마을들이 대변신을 시작했다. 국적 불명의 슬레이트 지붕과 흉물로 방치된 빈 집들이 즐비했던 농어촌이 전통 한옥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살고 싶고 살만한 동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꾀죄죄했던 촌동네가 한 폭의 그림 같은 한옥마을로 탈바꿈하자 마을을 등졌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한옥을 체험하려는 관광객들도 줄을 잇는다.
노령화, 공동화 한 농어촌 마을의 이 같은 변화를 두고 촌사람들은 "행복마을 효과"라고 했다. 행복마을은 전남도가 농어촌을 살기 좋은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조성 중인 신개념 농어촌 주거지구. 기존 마을을 한옥마을로 리모델링 하거나 새로 마을을 만들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전통 주거문화와 농촌 공동체도 복원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이 사업은 2007년 12월 시작됐다. 기존 마을에 한옥을 10채 이상 짓거나, 한옥이 20채 이상 들어서는 새 동네를 만들 경우 마을 공공기반시설비(5억원)와 갚지 않아도 되는 보조금(가구당 2,000만원)을 지원키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먹고 죽을 돈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도는 한옥발전기금 205억원을 확보해 연리 2%로 3,000만원을 빌려주고, 일선 시ㆍ군에도 한옥지원조례를 만들어 별도 보조금 2,000만원을 지원토록 했다. 5,000만원만 있으면 100㎡(30.25평ㆍ신축비용 1억2,000만원)짜리 한옥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신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한옥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춘 '손님방'을 따로 만들도록 했다. 부족한 관광객 숙박시설도 늘리고 주민들의 소득증대도 꾀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한옥을 짓겠다는 농가가 줄을 이어 현재 41개 행복마을에 한옥 172채가 신축됐거나 공사 중이다. 연말까지 530채가 더 지어질 예정이다. 한옥을 지은 주민들은 민박을 해 부수입도 짭짤하게 올리고 있다.
실제 해남 두륜산 입구에 자리한 삼산면 매정마을의 경우 한옥 16가구에 57개 손님방을 만들었는데, 지난해 가구당 평균 2,500명의 관광객이 들어 평균 2,200만원씩의 수익을 올렸다.
이 마을 주민 최상용(60)씨는 "주말이면 손님방이 없어서 못 내줄 정도"라며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그 동안 없었던 버스승강장과 진입로까지 새로 들어서는 등 마을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외지인들의 귀촌(歸村)도 늘고 있다. 무안군 몽탄면 약실마을이 대표적이다. 도시생활에 물린 50~60대 은퇴자들이 이 곳에 새 둥지를 틀면서 27가구 60명에 불과했던 주민이 1년 새 37가구 95명으로 늘었다.
주민 박광일(49)씨는 "한옥들이 들어선 후 외지인의 전입은 물론 부모를 찾아 뵙는 자녀들도 늘어 마을에 활력이 넘친다"며 "올 여름부터 손님방에 민박을 치면 전원생활에 고정수입까지 생기니 일석이조 아니냐"고 웃었다. 현재 11개 행복마을에 모두 135명의 주민들이 새로 입주해 살고 있다.
행복마을이 인기를 끌면서 일부는 주변 땅값도 껑충 뛰었다. 고흥군 금산면 명천마을 김상우(51)씨는 "행복마을 조성 이후 땅값이 3배 이상 올랐다"며 "한옥이 주변 산세나 지형과 잘 어울려 미학적으로도 가치를 인정 받은 것이 땅값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농어촌 '한옥 뉴타운'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노동집약적인 한옥 건축은 일자리 창출?크게 기여한다. 실제 한옥 1채 짓는데 연인원 350여명이 필요하고, 건립비용의 절반 정도가 인건비로 소요된다. 전남도는 지금까지 한옥 신축을 통해 연인원 14만9,000명의 일자리를 창출, 178억9,200만원을 인건비로 지출했다.
전남도 관계자는 "존폐의 기로에 선 농어촌 마을도 한옥으로 잘 가꾸면 그 자체가 관광자원이 되고 마을공동체와 지역경제도 되살아 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앞으로 주민 소득증대를 위한 마을별 체험프로그램을 적극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함평=안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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