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임철순 칼럼] 화장을 다 지우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임철순 칼럼] 화장을 다 지우고

입력
2009.05.06 00:54
0 0

지난해 2월 대통령직을 마감하고 KTX와 승용차를 이용해 봉하마을로 낙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제 버스 편으로 검찰에 나왔다. 5시간 남짓한 그의 원치 않는 서울행을 지켜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착잡함과 수치심을 느꼈다. 본인의 참담함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면목이 없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다"는 출발 전 인사와, 검찰청사에 도착했을 때의 "면목없는 일"이라는 말을 통해 충분히 그의 기분을 알 수 있다.

또 검찰 불려나온 전직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는 데 대해 지지자들은 '5년 만에 되풀이된 사화(士禍)'라거나 '졸렬한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반면 그를 증오해온 사람들은 '위선의 정치가 종식되는 계기'라며 구속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검찰청사 주변에서는 예상대로 시민단체 간의 몸싸움도 벌어졌다.

노 전 대통령을 두둔하는 말 중에서는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언급이 인상적이다. "(참모의) 생계형 범죄에 연루된 사람을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조직적 범죄를 진두지휘한 사람과 같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불의의 범죄 연루자일 뿐이며, 돈을 받은 방식이 그들과 다르고 액수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그보다 앞서 검찰에 소환돼 구속됐던 두 전 대통령과 결국은 같다. 재임 중에 돈을 받거나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 정치적 동기가 같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삶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인간적 결함이 같다. 노 전 대통령은 말과 탈이 많았으나 장점도 많았고, 세상과 역사에 대해 분명한 논리를 갖춘 인물이며, 처음 고향으로 돌아간 전직 대통령으로서 주목 받았다. 하지만 다른 전직 대통령들처럼 실패하고 말았다.

지난해 3월 7일 이 칼럼의 '화장을 지우고'라는 글을 통해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낙향 준비를 해온 데 비해서는 퇴임 후의 설계가 의외로 부실한 것 같았다. 승부의 대척점에 서서 현실적인 쟁점과 부닥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 사람들 속의 격리된 삶에 대한 걱정과 감상이 퇴임 무렵에 그가 들려준 말이다. 퇴임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대에 서기 위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도 했다.

하지만 그는 화장을 제대로 다 지우지 못했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으로 정치를 계속해왔다. 김영삼ㆍ김대중 두 전 대통령이 계보 관리를 위한 정치자금을 받은 것과는 다르지만 재임 중에 '패밀리'들끼리 돈을 챙겼고, 그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과 관계망의 유지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인터넷에 띄운 글대로, 퇴임 직후부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수사가 벌어지고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된 상황이었다면 자신과 주변을 더 단속해야 마땅했다. 공익적 사업을 하기 위해 설립키로 추진했다는 ㈜봉화는 줄줄이 백수가 된 수족들의 일자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만들 수는 없었다. 공익적인 취지라면 좀 더 광범위하게 공개적으로 추진하는 게 옳았다.

전직 대통령에게 전통시대의 선비와 같은 청빈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들은 왜 굶주리지 못할까. 특히 일관되게 부정부패 척결을 외쳐온 깨끗한 정치인이라면 퇴임 후 가난에 쪼들리거나 굶주려 마땅하다. 그와 그 주변이 굶주린다면 국민들이 앞장서서 도와주었을 것이다.

퇴임 후의 바른 삶 더 궁리해야

노 전 대통령의 삶이 이것으로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속되든 되지 않든 그의 삶은 앞으로도 길다. 그는 처벌 받아야 하지만 그 자신과 나라, 국민적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거듭나기를 바란다. 노 전 대통령은 "나를 버리라"고 했지만 그가 말했던 도덕과 이상마저 부정돼서는 안 되며, 이 비루한 현실정치에서는 이상주의적 수사(修辭)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돼야 한다. 공직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경우를 보며 퇴임한 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화장을 다 지우고 살아야 한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