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석영이 '유라시아 평화열차'라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황석영다운 상상력이다. 르 클레지오, 오르한 파묵 등 자신과도 친분이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등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한국의 작가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파리에서 출발해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다는 구상이다.
과거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종착역이었던 파리를 기점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른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가 경의선을 타고 서울로 온다는 여정이다. 몇 년 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위한 물밑 작업을 해왔다는 황석영은 한국 정부와 북한측에도 "흥정"을 붙여, 일단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열차는 예술가들의 꿈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2005년 9월에는 설치미술가 전수천이 미국에서 15량의 열차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 천을 두르고 뉴욕을 출발해 LA까지 7박 8일 동안 5,500km를 달리는 '미 대륙 횡단 드로잉 열차' 프로젝트를 실현시킨 바 있다. 광활한 미 대륙을 캔버스 삼아 흰색이라는 한국적 이미지로 대지에 드로잉을 그려보겠다는 전수천의 상상력은 구상 이후 실현까지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방북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황석영의 '유라시아 평화열차'는 아직도 구상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젊은 한국의 소설가들은 이미 통일 이후를 그린 소설들을 써내고 있다. 최근 그런 작품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 소설에 한동안 남북관계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 한 작품이 드물었던 탓에 더 반갑다. 그 중에 며칠 사이 흥미롭게 읽은 것이 1969년 생인 신경진의 <테이블 위의 고양이> 와 1970년 생인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이란 소설이다. 국가의> 테이블>
신경진의 소설은 재미있다. 캐나다 국적을 가진 한국인 도박사가 주인공인데 그가 살인사건에 얽혀들면서 남북한의 첩보전에 휘말리고 마카오와 일본의 카지노를 무대로 남북관계를 좌우하는 한 판 도박판에 뛰어든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도박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슬롯> 으로 1억원짜리 문학상을 받고 등단했던 신경진의 두번째 작품이 역시 도박이라는 이색적인 소재로 남북관계를 다뤘다는 것이 흥미롭다. 슬롯>
이응준의 소설은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통일한 지 5년이 지난 2016년 서울'이 무대이다. 통일 후 조폭이 된 인민군, 타락한 서울의 밤거리가 마치 누아르 영화처럼 그려진다. 한 평론가가 썼듯이 "이런 '센'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리고 '차갑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이다. 소설 말미에는 작가가 읽고 도움을 받았다는 남북관계에 관한 책 300여권이 참고도서 목록으로 박혀 있다.
50년 전에 최인훈의 <광장> 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도 북도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가던 수송선에서 바다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황석영의 <손님> 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당시 학살의 기억에 평생 악몽을 꾸던 인물이다. 손님> 광장>
이들보다 30여년 늦게 태어난 젊은 작가들은 숨막히는 이데올로기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그들은 훨씬 자유롭고 경쾌하게, 더 풍부한 상상력으로 남북관계를 그린다. 상상력은 힘이 세다. 견고한 현실에 변화를 주고 완고한 인식을 무너뜨린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더라도 황석영의 '유라시아 평화열차'가 머지않아 한반도의 대지를 이어 달릴 날이 올 것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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