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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를 만나다] <25> 소행성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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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를 만나다] <25> 소행성에서 온 편지

입력
2009.04.2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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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부터 사월입니다

사방은 차츰 빛을 잃어 가는 양 떼의 희미한 울음소리로 가득합니다 나는 독 오른 꼬리를 한껏 치켜들고 밤의 서랍이 쏟아 내는 은빛 알갱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천문학자의 예상대로라면 이 행성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겠지요 수억 년 동안 검게 물결치는 밤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나직이 흘려보내는 글자들을 받아 적으며 그를 기다립니다 방울뱀의 허물과 하나둘씩 흩어지는 별자리들의 지도… 이 작고 푸른 행성은 부스러기뿐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깨지지 않는 둥근 돌의 매끄러운 감촉 대신 사라지는 빛, 한순간 차오르는 어둠을 기록해야 합니다 똑바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뒤뚱거리는 두 발 대신 꼬리를 달았듯이.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흔들리는 모슬린 커튼의 달빛을 뒤로한 채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모래알처럼 나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와 모래언덕에 도착했습니다 모래가 나를 덮을수록 기록은 확연해져 갑니다 이 행성의 관습대로라면 시간은, 따뜻한 물의 기억에 잠겨 일렁이는 여린 이파리 대신 먼 여행의 끝에 다다른 죽은 낙타의 텅 빈 동공을 먼저 펼치겠지요 모래가 쌓일수록 나는 선명해집니다 흔들리는 하나의 얼굴을 맴돌며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는 여러 개의 고독한 얼굴들을 품고서 세계는 이제 막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항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별들이 선로 위에 쓰러지는 밤입니다 나는 시든 꽃 이파리로 흩어지는 내 얼굴을 버리고 환히 빛나는 독 오른 꼬리를 높이 들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사월입니다 별자리를 잃고 희미해진 양들은 꿈속에서 매애매애 웁니다 첫 페이지를 적은 아름다운 손목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는 수천 광년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마른 우물 속에 버려진 희디흰 얼굴들에 파란 지느러미가 돋기 시작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진실을 쓰기 위해 찢겨진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 이 행성의 첫 페이지를 쓴 손길이 늘 궁금하다. 이 행성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 십 억년 후 최후의 행복한 나날이 있을 것이고, 더 시간이 흐르면 태양이 팽창하고 지구는 뜨거워져 생물들은 죽고 해안선은 길어진다. 바다가 증발하고 대기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지구는 생명도 공기도 없는 황폐한 행성이 되고, 마침내 하늘을 덮을 정도로 커진 태양이 지구를 삼킨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9장). 그 사이에, 방울뱀들은 꼬리를 쳐들고 사막의 하늘을 향해 멋진 소리를 낼 것이며, 만물은 교미하고 낳고 풍요로워질 것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페이지들은 황홀한 사진첩처럼 종말을 향해 한 장 한 장 아깝게 넘어갈 것이며….

서동욱(시인ㆍ서강대 철학과 교수)

ㆍ김경인 1972년 생. 200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수상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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