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춘향제를 달뜨게 하던 명무의 주인 조갑녀(86)씨는 나이 18세에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의 자태를 눈 여겨 봐 둔 갑부가 안방 마님으로 들어 앉힌 것이다. 늘그막에는 윤화까지 당했으나 내면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민살풀이. 흔히 긴 천을 들고 추는 살풀이만 알아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진통 무용이다. 그 춤은 늘그막에 세상의 부름을 받았다. 인터넷에 '조갑녀'라는 검색어를 주면 금세 확인된다. 최근의 춤 무대가 둘 올라가 있다.
지난해 '하이서울' 행사의 창덕궁 공연 모습, 2007년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어머니의 춤'이란 이름으로 가졌던 조씨의 31년 만의 무대가 그것들이다. 극히 단아하고도 절제된 춤사위에 객석은 얼어붙은 듯했다고 네티즌들은 기억한다.
요약하자면 '법도 있는 무거운 살풀이'의 재탄생이었다. 그의 춤을 아는 사람들은 '인간문화재'라는, 마지막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고향 남원에서는 지난해부터 그의 전수관 건립을 검토 중이다.
망구십이지만 집(서울 관악구 남현동) 부근의 미술관에서 그림 구경을 하고, TV로 세상 도는 소식을 접한다. 5년 전 그가 사고를 당한 뒤, 분신처럼 수발하며 춤의 정수를 전해 받는 큰 딸 정명희(50)씨가 세세한 기억을 도왔다. 권번(券番)이라는, 독특한 콘서바토리의 풍경도 인양돼 왔다.
- 여흥거리가 아닌 '무거운 춤'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 5월 문화재 지정을 신청, 남원 지방문화재가 됐다. 지금은 전주시를 거쳐 문화재청에서 심사 중이다. '무거운 춤'은 마음에서 나오는 춤이다. 내 춤의 기본은 발 모양에 있다. 그 사람 춤을 알려면 발을 보면 된다. 소리꾼으로는 조상현, 안숙선, 강도근 같은 무거운 소리를 좋아한다. 춤 잘 추려면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한다."
- 대를 이은 예인 가족이다. 남편도 예술에 깊은 이해가 있었다.
"나는 딸 여섯 중 제일 큰딸이다. 아버지(조기환)가 남원 권번의 승무 선생(이장선)과 음악 동기다. 이 선생님께서 영숙이(조갑녀씨의 예명) 몸에 춤이 들어있다면서 나를 별도로 가르쳤다. 한성물산 사장으로 호남의 부자였던 정종식과 결혼하면서 춤 생각을 모두 접었다. 사회에서 춤 추는 일을 천직으로 봤기 때문이다. 남편은 국악을 사랑하고 예인을 존경했다."
- 10년 몸 담았던 권번은 어떤 곳이었나.
"남원 쌍교동에 있었다. 돈 많은 양반들이 투자한 학원이어서 학비는 없었다. 예절부터 시작해서 글과 무용을 공부했다. 9~12시 수업, 12시 점심, 13~15시 수업, 16시까지는 자유공부 등으로 규칙적인 일과였다. 가르침을 받는 방이 4개 있었고. 대문에 '남원 권번'이라는 간판이 걸렸다. 권번은 훌륭한 종합예술학교였다. 거기서 활도 배워 50대까지 활 쐈다.
시조를 즐겨 듣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여덟 살 때 남원 춘향제에 나가 승무를 췄다. 양금으로 양반들의 음악인 '풍류 음악'도 배웠는데, 산조에 버금가는 춤 음악이다. 판소리(조씨는 그냥 '소리'라 했다)는 남도소리로 다섯 바탕을 다 뗐다.
곧 살풀이도 함께 배워 열두 살 때 춘향제가 열린 광한루에서 첫 공연을 했다. 남원 권번은 당시 권번을 관장하던 이백삼의 지시로 일본인들한테는 공연하지 않았다. 남원 권번이 그래서 못 컸다. 거기서 가르치기를, '기생들은 제대로 못 배운 예인이다. 접대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 배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 달라.
"공부하면서 현장 나가 춤추는 것이 곧 배우는 일이었다. 스승이 고집스럽게 가르치며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학생이 자기 춤 만들 기회를 줘서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춤은 스승을 잡아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녁(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춤을 잘 출 기회를 스승이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 흔히들 권번을 기생학교 정도로 알고 있는데.
"권번에서 배우면 곧 바로 (공연) 간다고 생각들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 머리를 얹어야 한다. 비녀를 꽂아야 출장 가는 것이다. 나는 16살에 품행상 탈 때 얹었다. 기생이란 권번에서 예인 실기를 정식 이수한 사람을 말한다.
술 따르거나 문 밖에서 손님 시중하는 자들은 접대부라 불렀다. 기생, 접대부는 분명히 구분됐다. 조선시대 말엽부터 그렇게 나뉘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예기(藝妓)를 수청 기생인 양 오해하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내 존재가 자칫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지레걱정이 있었다."
- 춤을 추지 않다가 생각을 바꾼 계기는.
"2004년 광한루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였다. 아침 산보 나가다 차에 받혀 서울의 큰 병원까지 가서 9개월 치료받았는데, 병원에서는 임종 준비까지 하라더라. 이러다 내 춤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을 힘 닿는대로 가르치게 된 것이다. 7년째다."
- 자식한테 가르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초ㆍ중ㆍ고를 서양 무용한 막내딸이 대학 갈 무렵, 큰딸은 이매방 등 다른 선생들한테 전통 무용을 배우러 다녔다. 그러던 중 내 춤의 맥이 끊길 수도 있다는 우려를 듣고는 나한테 배우게 된 것이다. 결국 두 유파(일반적으로 알려진 살풀이, 수건 없이 하는 민살풀이)의 춤을 모두 배운 셈이다.
거동 불편한 어미를 새벽에 부축해 한 바퀴 먼저 돌고, 오후 1~5시 본격 수업을 했다. 내 춤을 존경한다는 국어 교사인 사위 덕분이다. 두 외손자도 고맙기 그지없다."
- 왜 자신의 춤을 널리 알리지 않았나.
"1970년대 중반 문화재관리국에서 그 춤을 살려 문화재로 삼자, 그래서 공연도 많이 하자, 했다. 그러나 아이들 혼사에 방해될 것 같았다. 일간스포츠에 '명무(名舞)' 시리즈를 연재하던 구히서 기자가 알고 찾아와, 간곡한 부탁으로 사진 몇 장 찍은 게 전부다.(1982년 11월 20일자 일간스포츠 '명무' 시리즈 46편에는 조씨의 이름이 조갑례(趙甲禮)로 오기돼 있다. 그의 이름이 '갑례'라고도 알려진 이유다)
- 최근 인터넷 등에서 인간문화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나한테서 춤을 배운 딸이 지난해 5월 이장산의 마지막 직계라며 남원시에 이야기했다. 요즘은 인간문화재가 되어야 춤을 인정해 주는 모양이다. 젊은 사람들 앞에서 시험 치듯 춤을 추려니 가슴 아팠다. 나한테 '장단을 아느냐'고 묻던데, 어이없었다.
문화재라는 이름을 달아야 인정 받는 세태가 서글프다. 지난 1일 전통문화예술 복원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7월 7일 오후 7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대원당에서 재현과 복원 사업으로 춤출 계획이다. 가을에는 전주에서 공연한다. 서울 공연도 준비 중이다. 나라에서 내 춤을 복원시켜 준다니 아주 고맙구먼."
- 8남매나 두었다.
"큰 부인이 자식을 넷 남겨두고 세상을 뜬 뒤, 내가 여덟 낳았다. 똑 같은 마음으로 키우려 애썼다. 두 막내가 나를 이었다. 열한번째 딸 정명희, 막내 경희(47ㆍ전주여고 무용교사)가 승무와 살풀이를 전수중이다.
명희가 1년 반 전부터 양평군에서 무용강사로 내 춤을 40여명에게 전수하고 있다. 2007년 6월에는 조갑녀류의 살풀이를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독무로 8분 선보였다."
- 하고 싶은 말은.
"기생과 접대부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통 예인을 기생이라는 말로 불러 자식들 마음이 좋지 않았던가 보더라. 되도록 예인으로 해 달라."
●"춤은 참 맹랑한 것"
조갑녀씨는 "춤은 참 맹랑한 것"이라 했다. 뜻을 물으니 "춤은 춤맛이 있어야 하며 아무나 못 춘다는 뜻"이라 했다. 최근 조씨의 그 '맹랑한' 삶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남대 국문과 서정섭 교수는 지난해 조씨의 삶을 녹취했다. 완벽한 기예를 습득한 현장과 그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의 시선은 한 편의 소설이었다. 영화화 제의도 있다. 남원 예총에서 주목한 부분은 그의 인내와 가족애다.
특히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초개처럼 버리는 모습은 이 시대에도 큰 울림을 줄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외부의 가외 시선을 극히 꺼리는 조씨 특유의 성정상 현실화될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40~50대에 조씨는 문화재 담당 기관으로부터 옛 춤꾼들과 자신의 춤에 관한 '취조'를 많이 당해 데일 만큼 데였다고 했다. 부산의 친척집 등지로 피해 다니기도 했던 것은 진작부터 내외하던 습관에 길들여진 탓이기도 했다. 공연기획사 '축제의 땅'은 7월 조씨에 대한 헌정공연을 계획 중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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