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상주의자입니다. 현실과의 낙차가 크기 때문에 슬픔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소설은 슬픔이 슬픔이 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라고나 할까요. 슬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고 등단한 정한아(27)씨의 첫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 (문학동네 발행)의 정조는 '슬픔'이다. 수록작 8편에 스며있는 슬픔의 알리바이는 다양하다. 나를>
거인증에 걸려 농구선수가 됐으나 유부남 감독으로부터 성적 유혹을 당하는 여성('나를 위해 웃다'), 집나간 엄마와 자신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를 떠나 일찍부터 성매매에 뛰어든 소녀('아프리카'), 이스라엘의 협동농장 키부츠를 찾아 거친 노동과 환각파티로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는 여성('첼로농장'), 상처한 안과의사를 유혹한 뒤 그와 결혼을 앞둔 여성('의자') 등등. 작가는 작중인물들이 품고 있는 이 같은 슬픔의 조건들을 놓고 '삶은 긍정할 만한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그 난감한 삶의 조건들 앞에서 그들이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나는 세상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웬지 지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40쪽)라는 식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은 정한아 소설의 의미심장한 특징을 이룬다.
풍경 묘사를 통해 슬픔, 쓸쓸함, 외로움 등의 감정을 형상화하거나 절제된 표현으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섬세한 솜씨도 볼 만한다. "그와 나는 그렇게 잠시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상처입는 나무처럼,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나는 웅성대는 숲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느티나무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같은 표현이 환기시키는 쓸쓸함이나 "텅 빈 도로를 달리는데 순간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사력을 다해 핸들을 꼭 쥐고 있었다" 같은 문장에서 스며나오는 슬픔은 정씨 소설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인다.
프로이트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살부(殺父)를 통한 홀로서기'는 많은 소설들이 반복적으로 다루는 주제. 그런 맥락에서 딸을 위해 최고급 재료들로 스페인식 소시지를 구워주거나('마테의 맛'), 미뉴에트를 들으며 출근하는 엄마를 위해 계란 프라이를 준비하는('댄스댄스') 인간적이고 소통가능한 아버지가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1990년대 한국 여성작가들이 그려낸 아버지 상과도 다르고, 아버지를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거나 무력하기 짝이 없게 그려내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과도 차별된다.
"운이 좋게도 실제로 아버지가 다정하고 이상적이신 분이죠"라며 작품 속 아버지 상이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것임을 귀띔한 정씨. 깊은 슬픔 속에서도 그 슬픔을 자기 긍정의 힘으로 밀고 나가게 하는 정씨 소설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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