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캠프에서 심부름을 하던 10살짜리 한국꼬마를 잊지 못해 외아들 이름도 '킴(Kim) 바인딩'으로 지었습니다."
18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설마리 영국군 전적지에서 열린 '글로스터셔 연대'의 추모행사에 참석한 데이비드 바인딩(79) 씨.
1950년 10월 당시 19세였던 바인딩 씨는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영국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던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첫 발을 디뎠다.
그는 "출발할 때만 해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크리스마스쯤에는 돌아올 수 있다고 들었지만 그로부터 3년이 흐른 후에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설마리 전적지는 1951년 4월 영국군이 54명의 전사자를 낸 격전지. 바인딩 씨가 속한 부대는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감악산 봉우리에 쫓겨 꼬박 사흘을 식량도 없이 버티다 끝내 투항했다.
이때부터 북한 두만강 인근 지역에서 2년 반 동안 포로생활을 한 그는 "처음 열흘 간은 먹을 것을 전혀 주지 않아 전우들이 굶어 죽기도 했다"며 "상당수의 전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낙담했지만 나는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퇴역 후 고향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한 그는 "평생동안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한국은 제2의 고향이자 조국"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중간에 자신의 아들 이름 'Kim'이 새겨진 은색 손목 팔찌를 보여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 바인딩 씨는 병으로 일찍 죽은 외아들에 대한 슬픔과 한국전쟁의 잔상이 겹치면서 감정이 북 받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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