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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 동네서점 "문화야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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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 동네서점 "문화야 놀자"

입력
2009.04.22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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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 상처를 정강이에 새기며/ 오래오래 걸은 후에야/ 집 하나 겨우 얻었습니다."

연극배우 조운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길상호 시인의 시집 <모르는 척> 중 '물의 집을 허물 때'를 읽어 내려갔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초중교 학생들, 젊은 엄마들까지 40여명의 손님들은 가만히 귀 기울며 시의 운율과 의미를 음미했다. 이어진 저자와의 대화에서는 길 시인은 시 쓰기와 감상법에 대해 조언했고, 손님들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했다.

행사 내용이야 여느 대형서점에서 볼 수 있는 '저자와의 대화'와 다를 바 없지만, 모양새는 달랐다.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는 좁은 공간에선 시인과 낭독자의 작은 숨결까지 듣는 이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 자리한 '도원문고', 105㎡(32평) 남짓한 공간에서 21일 오후 펼쳐진 풍경은 동네 서점들의 변화 몸부림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동네 서점들이 달라지고 있다.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의 공세에 밀려 사양길로 내닫던 동네 서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에 나섰다. 인근 학교 학생들이나 찾는 '참고서 판매상'에서 벗어나 '내 곁의 작은 도서관' 또는 '동네 문화사랑방'으로 변신을 꾀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손님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발길이 오래 머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 사라지는 동네 서점들

동네 서점은 1980년대만 해도 전국 7,000곳에 달하며 성업을 누렸다. 대형 서점과 동네 서점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도서대여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매출이 급감하더니, 외환위기를 겪고 인터넷서점이 등장하면서 결정타를 맞았다. 대형 서점들도 인터넷서점의 선전에 놀라 한층 공격적인 경영에 나서면서 동네 서점들의 목을 옥죄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한국서련)에 따르면 1997년 전국 5,407곳이던 서점은 4년 만인 2001년 절반도 안 되는 2,646곳으로 줄었다. 현재는 2,000여곳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지난해 200여곳이 문을 닫는 등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33㎡(약 10평) 이하의 꼬마 서점들. 1997년 2,700여 곳으로 전체 서점의 절반을 차지했던 꼬마 서점은 이제 겨우 100여 곳만 남았다.

■ 동네 서점 생존모델 찾기

한국서련이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선정한 '모델 서점'은 이런 변화 움직임의 최일선에 서 있다. 올해는 도원문고와 울산 삼산동 '도담도담 책놀이터' 2곳이 모델 서점으로 선정됐다.

시작은 미미하다. 그러나 '서점을 거리의 도서관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들 서점은 확실한 성공 모델을 만들어 동네 서점들이 뒤따를 수 있게 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겉모습부터 바뀌었다. 책을 서가에 진열할 때 책 제목만 보이는 꽂는 게 아니라, 대형 서점들처럼 베스트셀러의 경우 책 표지까지 볼 수 있게 진열한다. 독자들이 도서정보를 담고 있고 그 자체로 작품인 표지를 보고 책을 고를 수 있게 하려는 배려다.

진열된 책 수를 줄이는 대신, 청소년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의 베스트셀러 목록 등을 참고해 진열할 책을 엄선하는데 더 애쓴다. 또 저자 초청강연회, 독서토론회, 책 읽어주기 행사, 어린이 책읽기 대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열고 있다.

모델 서점뿐 아니다. 충북 충주의 '책이 있는 글터'는 지하 매장에 방음벽과 이중문, 진공관 오디오를 갖춘 음악감상실을 만들어 음악감상회는 물론, 동화 읽는 교사 모임, 주부들의 독서토론 모임을 여는 등 문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동네 서점에서 놀자"

동네 서점들의 변신에 지역 사회도 반색하고 있다. 울산의 '행복한 아버지 독서회'는 도담도담 책놀이터에서 매주 독서토론회를 열기로 했고, '책 읽어주기 아빠 모임'도 월 1회 이 서점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계획이다.

도원문고가 만든 어린이 독서클럽 '문화사랑방'에는 벌써 이 지역 초등학생 2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옥수초등학교 4년 강혁(11)군은 "예전엔 (서점이) 좁고 책이 층층이 쌓여 불편했는데, 넓고 깨끗해져 자주 오고 싶어진다"며 "독서를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화행사도 주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이날 도원문고 시낭송회에 참여한 이아영(24ㆍ여)씨는 "이런 행사를 자주 연다면 동네 서점으로 발길이 저절로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정향채(55ㆍ여)씨는 "동네 서점이 교양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찾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동네마다 이런 서점이 한 군데씩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 정책적 뒷받침도 있어야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네 서점들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가격 경쟁에서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을 따라잡을 ?없기 때문이다. 한국서련 관계자는 "연합회 소속 400여 서점이 공동구매 등의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하소연했다.

동네 서점들이 집 하나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정강이에 새기고 오래오래 걸어야 할까. 이창연 한국서련 회장(도원문구 대표)는 "가격정찰제가 제대로 지켜지고 인터넷과 소형 서점이 비슷한 조건으로 책을 공급받도록 하는 등 제도적인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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