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살짝 훈풍이 불었다. 부동산 거래가 재개되고 있고, 주식시장 분위기도 좋아졌다. 위기의 진앙인 미국에서도 하강속도가 누그러지고 있다는 연방준비은행(FRB)의 보고서가 나왔다. 고삐 풀린 금융자본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발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게임은 계속되고 있다. 주도권은 아직 미국이 쥐고 있지만, 이러한 질서가 더 이상 존경 받기는 어렵다. 이제 동아시아는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대처방식 다른 한중일 3국
먼저 일본을 보자.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년대비 12.1%나 급감했는데, 이는 선진7개국(G7) 가운데 최악의 상황이었다. 장기불황 이후 내수기반이 크게 붕괴되면서 2000년대 들어 수출,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에 의존한 성장을 지속해 왔다. 일본의 수출의존도는 10% 내외로, 한국, 중국에 비하면 크게 낮은 편인데, 위기의 충격은 오히려 더 큰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전례 없는 대량 해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도요타가 올 3월까지 6000명을 해고하기로 했고, 소니는 2010년까지 1만 6000명을 감원한다고 한다.
경제 침체는 일본사회 전체에 무기력증을 초래하고 있다. '취업빙하기'에 처해 방향과 활력을 잃은 청년들이 쏟아지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뢰와 네트워크의 붕괴, 사회 해체가 운위되기도 한다. 정치적 리더십도 실종되어 냉소와 혐오가 일반화된 상태에서, 북한의 로켓 발사 같은 이슈에만 유난히 민감하다. 전환의 시대에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창조적이고 능동적 역할을 일본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은 단연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지난 3월 중국 중앙은행 총재의 "달러에 대한 대안으로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의 역할을 확대하자"는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미국 국방부가 개최한 사이버 워 게임(War Game)에서, 중국은 1조 달러의 보유 자산을 조금씩 내다 파는 중간 전략으로 자신의 손실 없이 미국에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고도 한다. 사석에서라면, 미국과 중국의 G2 체제, 아니 중국이 주도하는 G1 체제가 쉽게 거론되곤 한다. 유비가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여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르던 상황(韜光養晦ㆍ도광양회)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다.
물론 중국도 위기 속에 있다. 금융위기 이전부터 노동비용이 급증하면서 경쟁우위 요소를 잃은 중소기업들의 몰락이 이어지고 있었다. 과잉투자와 이를 따르지 못하는 국내소비의 불균형 상황은 계속 심화되었다. 지방의 과도한 부동산 개발, 철강ㆍ시멘트ㆍ알루미늄ㆍ자동차 등에 대한 과잉 투자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또한 중국의 고도성장은 세계시장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중국의 수출의존도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시점인 2001년 22.6%에서 2006년에는 36.9%로 급증했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초래한 무역 감소는 중국의 성장방식이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계엔 누가 먼저?
그럼에도, 중앙정부의 리더십 측면에서는, 중국이 상대평가에서 앞서 있는 편이다. 중국은 몇 차례의 결정적 위기를 잘 관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위기에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대응했다. 작년 9월 금리와 지준율을 인하했으며, 10월에는 내수를 확대하는 10대 정책을, 11월 초에는 4조 위안에 해당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주류 엘리트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지나치게 해외에 의존하는 축적방식의 한계를 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후진타오 체제는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를 이념으로 표방한 바 있다.
한국은 어떤가? 경제위기는 물론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도 위기를 맞고 있으며, 엘리트들은 분열을 선도하거나 방치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동아시아 근대는 '시간과의 경쟁'이었다고 한다. 구질서를 청산하고 새로 입헌국가를 성립시킨 일본이 먼저 근대에 도착했고, 기득권 세력이 건재하고 내부가 분열된 중국과 조선은 내전과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위기 이후, 새로운 세계로는 누가 먼저 나아갈 것인가?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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