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386세대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두환 정권이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들은 캠퍼스의 낭만 대신 교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백골단을 먼저 만나야 했다. 또한 대학의 자유로움보다 민족과 민주를 외치는 동료들의 자살을 목도해야 했다.
민정수석은 대통령 눈치보게 돼
이런 386세대들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대학 시절의 투쟁에서 배운 기억의 찌꺼기들이 맴돌고 있는 것 같다. 386세대에게 제도는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제도란 전두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상이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아니 그들 스스로가 이런 세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작 자신들의 사고구조를 바뀐 세상에 맞게 변화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바뀐 세상에서 정통성 있는 제도를 유지하고 가꾸려는 노력보다 제도 자체에 무관심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자신들을 아직도 절대선으로 생각해서 자신들의 하는 행위에 스스로 지나치게 관대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정신적 386'이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다. 실제 그의 주위에는 많은 386세대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적 386이든 실제 386이든 그들은 박연차 리스트와 강금원 리스트에 의해 거의 초토화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이 만약 제도적 마인드가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그리고 스스로에게 보다 엄격했다면 이런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제도를 개선할 충분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여러 미비한 점을 안고 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친인척과 권력 주변 인물들을 감시하기 위해 민정수석비서관을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이 임명한 민정수석은 구조적으로 임면권자인 대통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 친인척과 주변 인사들에 대한 감시 시스템이 무력해져 이번 노무현 게이트처럼 대형 비리가 곪아터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이 같은 제도적 결함을 고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친인척과 권력 주변 인물들을 감시할 인물을 입법부가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회에서 여야 동수의 위원회를 만들고 이 위윈회에서 감시자를 선발한다면, 그 감시자는 지금보다는 권력의 눈치를 덜 보면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발상에 대해 권력 분립의 취지에 위반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제의 권력 분립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입법부 소속인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행정부의 장관을 맡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심지어 총리까지 역임한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는 권력 분립에 대해 언급하지 않다가 권력의 감시 기능을 입법부에 맡기자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 권력 분립 정신에 반한다고 반대한다면, 권력 분립은 필요에 따라 둘러대는 명분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야동수 위원회서 감시자 선정
입법부에 의한 감시자 임명 외에 대통령 친인척과 권력 주변 인물의 일탈을 견제하는 역할을 할 기구의 설립도 필요하다고 본다. 유사하거나 중복된 업무를 통해 서로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보다 투명하게 권력에 대한 감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 대통령 이후 대통령들이 진정 역사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이런 2중의 감시망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기록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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