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 지음/문학동네 발행ㆍ288쪽ㆍ1만원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것 같다.
김유진(28)씨의 첫 소설집 <늑대의 문장> 은 독자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잔혹한 야생의 이미지들로 구축된 시원(始原)의 세계를 보여준다. 발표 순서대로 배치된 9편의 단편소설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방식으로 독자들의 감정을 점진적으로 증폭시키면서, 메시지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려 고안된 소설의 전통적 구성원리를 대놓고 비웃는 듯하다. 늑대의>
개와 뛰어놀던 세 소녀가 원인도 모르게 폭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표제작이나, 마녀사냥을 연상케 하는 마을 노파에 대한 린치 장면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골목의 아이'의 첫 장면을 읽다보면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된 독자들만 내 소설을 읽어라"는 김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잔혹한 동화를 연상케 하는 김씨의 이 그로테스크한 세계는 여러 요소들이 결합돼 더 공고해진다. 일정한 직업 없이 못이 박힌 각목을 끌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길짐승을 잡아 족치는 사내('골목의 아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 손끝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는 여중생들('낙타관광') 같은 인물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시간적 배경이 현대인지 19세기인지 혹은 중세인지 모호하게 처리되기도 한다. '눈알이 사라지고 없는 그의 눈구멍을, 짓눌린 코를, 민물고기에게 물어뜯긴 두피를, 두부처럼 뚝뚝 끊긴 손가락을, 내 눈에 담았다' 같은 문장에서는 '악' 소리가 날 지경이다.
김씨 소설 읽어내기의 핵심이란 따라서 이같은 그로테스크한 장치들이 무엇에 복무하는가,하는 것을 해독하는 일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같은 장치들은 '기원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시원적 존재 양상은 어떠했을까? 고통이라는,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의 원천적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따위의 것들이 김씨가 싸우는 문제다. 많은 소설이 폭력과 야성이 지배했던 문명 이전의 세계, 말하자면 '늑대와 개의 세계'에 가위눌려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소설가로서의 자의식 때문인지 '이야기'의 발생 기원을 묻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들, 혹은 마을이 태어나기 전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 언니가 주인공인 단편 '목소리', '마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어른들은 알아내기 힘든 은밀하고 기이한 소문을 모으는' 부랑아들의 이야기가 삽입된 단편 '움'과 같은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2004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씨는 "한 거대한 늑대의 눈빛이 클로즈업된 다큐멘터리의 장면에 매혹돼 대학(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때 시를 썼고, 이 시를 개작해 등단작이 된 소설 '늑대의 문장'을 썼다"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씨는 김태용(35), 한유주(27)씨 등 시적인 문장을 애용하는 젊은 소설가들의 흐름에 한 발을 담그고 있다. '소 등에 짚단처럼 묶인 들꽃들이 빗속에서도 푸르렀다'와 같은 매력적인 문장이 시원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향수를 묘하게 자극한다.
신상순 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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