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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연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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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연과 운명

입력
2009.04.0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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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쓴 영국계 다국적 인디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의 전세계 흥행성적이 놀랍다. 1,4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이 영화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글로벌 영화제에서 88개의 상을 수상하며 3월 초까지의 흥행이 2억달러를 돌파하더니 한 달 만인 지난 주말엔 3억달러를 넘어섰다. 역대 아카데미상 수상작과 비교하면, '수상 효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요소가 영화에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관객들의 감동과 호평을 자아내고 입소문으로 확산돼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길을 불러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인도 빈민가 출신의 무학 청년이 TV 퀴스 쇼에 출연해 일약 백만장자가 된다는 판타지 통속소설 같은 줄거리에 과연 뭐가 있었을까. 혹자는 대니 보일 감독의 감각적 카메라워크와 속도감 있는 편집을 말하고, 혹자는 외교관 출신 소설가 비카스 스와로프의 원작 나 이를 각색한 <풀 몬티> 의 작가 사이몬 뷰포이를 언급하지만 결국은 우연과 운명이란 두 화두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일상적 삶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스토리와 연출의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천재일 필요는 없다. 삶이 그 답이다"는 주인공 자말의 개똥철학이 더 와닿는다

▦ 자말에게 삶은 'destiny' 혹은 'It's written'이라고 표현되는 운명이다. 그 운명은 우연과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이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다. 일례로 <다르샨 도 간샴> 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지은 인도시인 수르다스를 맞히는 장면을 보자. 자말이 어릴 때 조폭에 납치돼 앵벌이하던 시절, 눈이 먼 아이들이 훨씬 많은 돈을 벌어오자 조폭들은 이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들을 골라 강제로 눈을 멀게 하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자말은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 도망친다. 그런 자말이 퀴즈의 답을 맞힌 것은 이미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불리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옥중에서 유행가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를 우연히 만난 박찬종 변호사의 전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우리의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피라미나 모기 수준인데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에) 대포를 맞았다"는 말도 했단다. 뜻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우연이라는 기회를 잘못 활용하는 바람에 지옥 같은 운명에 처했다는 자탄으로 들린다. 영화와 현실, 또 우연과 운명을 넘나드는 삶이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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