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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민주당은 명분을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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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민주당은 명분을 논하지 말라

입력
2009.04.07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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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현실인가 명분인가. 일단 명분이다. 어감도 그렇다. 현실의 정치보다는 명분의 정치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한국 정치사에서 명분의 정치라 불릴만한 사건은 몇 있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이다.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인 1983년 5월18일,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물론 언론은 부끄럽게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고 단식이 길어지자 '재야인사 문제' '현안 문제'라는 해괴한 제목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지학순 주교 등의 간곡한 권고로 23일만에 그쳤지만, YS의 단식은 잠자던 저항의식을 깨워 정치흐름을 크게 뒤흔들었다.

지금은 돈 들여서 다이어트를 위한 단식도 하지만, 당시는 부모가 자식에게 말 조심을 당부할 때라 목숨을 건 그의 단식은 비장한 결단이었다고 평할 만 하다.

또 하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선고다. 80년 신군부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며 내란음모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신군부는 삶과 죽음을 놓고 회유했으나 김 전 대통령은 삶을 거절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대법원은 81년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가 굴복하지 않았기에 전세계는 한국을 다시 쳐다보게 됐고 전두환 정권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후학들이 보면, 그저 낭만적인 옛날 얘기로 들리겠지만 당시의 회유 거절은 죽음을 의미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고색창연한 일화를 꺼내는 이유는 요즘 정치인들이 너무 쉽게 명분의 정치를 운위하기 때문이다. 가장 어색한 것은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전주 덕진 공천을 놓고 주고받는 명분론이다. 정 전 장관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밀알론을 얘기했지만 누구나 그가 명분이 아닌 현실을 택했음을 안다. 그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더욱 우습다. 정 전 장관에 대해 공천을 주지 않는 것이 마치 이 나라 정치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일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정 대표와 지도부 표정에는 비장함이 흐른다. "누가 뭐래도 명분을 택할 것이다"는 확신에 찬 다짐도 나온다.

하지만 국민은 웃는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다른 큰 일이 더 많은데. 이미 열린우리당 시절부터 숱하게 보았던 싸움일 뿐이다. 정말이지 신물나는 도토리 키재기다.

김대중, 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은 결정적인 순간 명분의 승부수를 던졌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을 중시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장외로 나갔다가 어느 날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국회로 돌아왔다. 작은 승부에서는 현실적 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오도 적지 않았고 숱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정치사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명분을 쓸 때와 현실을 택할 때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민주당에게 전주 덕진 공천은 지극히 작은 현실정치의 게임일 뿐이다. 4월 재보선이 끝나고 나면, 지금의 공천갈등이 얼마나 명분과 관계없는 일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깨달으면 늦다. 왜소한 민주당이 더 왜소해져 있고 거기에 관련된 이들은 더 초라해져서 책임을 떠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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