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한 명동예술극장이 6월 5일 개관한다. 명동 국립극장은 1957년 개관,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하기까지 명동을 한국의 '문화 1번지'로 만드는 데 한몫을 톡톡히 했다. 당시 명동의 낭만을 추억하는 예술인들 등 많은 이들이 36년 만에 부활하는 명동예술극장의 개관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과연 명동은 문화 중심지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예전의 영화를 온전히 되찾지는 못할지언정, 삭막한 상업지구가 돼버린 이곳에 문화의 온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바라는 게 많은 이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명동예술극장 복원 외에도 또 다른 새로운 극장들의 개관과 국내 소극장의 대명사인 삼일로창고극장의 부활 소식도 들려오는 요즘, 우리는 그래서 명동의 6월이 기다려진다. 많은 이들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문화 1번지 명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문화 중심가로 거듭날 그 거리의 이야기다.
● 우리는 그곳에 청춘을 묻었다
"정말 낭만이 있었지."
1960년대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섰던 배우들만큼 명동예술극장의 개관 소식에 설레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공연 준비가 한창인 신촌 산울림소극장 분장실에서 만난 배우 박정자(67)씨는 명동의 추억을 묻자 미소를 머금은 채 한참 동안 먼 곳을 응시했다.
1962년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선 그는 "명동에 청춘을 다 묻었다"고 했다. "그때 함께 연기했던 추송웅, 함현진씨가 살아 있었다면 우린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특히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예술인들에게 아지트였던 다방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다방은 그냥 차만 파는 곳이 아니라 그림전시회, 영화ㆍ문학 강연, 출판기념회를 열던 문화공간이었다. 박씨는 "'이사벨' 다방에 통행금지에 걸린 연극인들이 모여들어 밤새 토론한 뒤 새벽녘에 귀가하곤 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청춘을 바친 명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연출가들도 마찬가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연극연출가 임영웅(76)씨는 "다방으로 출근하던 시절"로 당시를 기억한다. 명동은 힘없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기에 특별한 약속 없이 그곳으로 나와도 단골 다방에 들르면 반드시 누군가와 마주쳤다.
웬만한 한국의 예술가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동방쌀롱'에선 연극인 고 이해랑 선생을 비롯한 연극, 음악, 미술, 문학 쪽의 사람들을, '천동다방'에 가면 시인들을, '갈채다방'에선 소설가 고 김동리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을 만났다. 고전음악다방 돌체에는 주로 음악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다방문화'가 형성됐던 것은 절망적이었던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이었다는 게 연출가 김정옥(77)씨의 말이다. 함께 모여 절망을 달래던 곳이 바로 다방이었다.
그들은 다방에서 음악을 들었고, 명동 뒷골목에서 값싼 먹거리로 끼니를 해결했다. 배우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술집 '은성'은 당시 문화예술인들의 최고의 아지트였다.
명동 국립극장의 사실상 폐관작이 돼 버린 '한네의 승천'으로 연출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던 손진책(62)씨의 말을 빌리면 "명동 다방은 연극인들에게 기획실이고, 제작실이고, 손님 접대실이었다." 사무실을 갖춘 극단이 극히 드물었던 시절인 까닭이다.
연극인들에게만 명동이 특별한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가수 조영남(64)씨는 연극 연습을 마친 고 김동원 선생에게 무대에 조명 하나 켜 놓고 노래를 불러줬던 1966년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고 했다. "명동 국립극장은 나에게 최초의 단독 콘서트장이었어요. 지금도 콘서트에 설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니까…."
● 극장이 있기에 명동도 있었다
명동 국립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었다. 명동의 상권을 움직이는 구심점이기도 했다. 특히 하루나 이틀 공연되는 음악, 무용과 달리 연습부터 공연까지 한달여가 소요되는 연극은 명동의 상가 활성화의 주역이기도 했다. 공연 기간이면 연극인들은 명동의 호텔과 식당가, 술집 등을 사실상 먹여 살렸다.
그래서 배우 박웅(69)씨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1960~70년대의 명동은 상업과 문화가 공존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명동은 예술가들이 만남과 여가를 보내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연극이 명동 상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대학로 중심의 연극계와는 또 다르죠. 상업도 문화니까." 그는 "연극인만 모이지 않고 장르를 망라한 모든 문화예술인이 모인 것도 대학로와는 다른 점"이라고 덧붙였다.
● 피폐한 정신의 시대 밝혀주기를
최고의 공연장이던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옮겨간 후에도 명동은 한동안 여전히 문화 중심지의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국립극장 대신 삼일로창고극장, 엘칸토예술극장 등?소극장 무대가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상징적인 국립극장의 명동시대 마감은 연극인들에게는 곧 활동 무대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박웅씨는 명동 국립극장 폐관으로 인한 좌절감과 절망감이 컸다고 했다. "정부는 장충동에 큰 극장을 세워줬는데 왜 불평하느냐고 했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대안이었지요. 이건 마치 연극인들에게서 연극을 빼앗는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어요. 다들 중극장과 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겨갔지만 각자 대관도 힘들고 하다 보니 명동 국립극장 시절만큼 뭉칠 수는 없었지요."
그토록 상징성 컸던 명동 국립극장의 복원.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명동예술극장 개관이 곧바로 옛 영화를 되찾는 길이라 믿고 있을까. 그들은 하나같이 기대와 설렘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손진책씨는 "공연의 패러다임이 바뀐 시대상황을 고려해 옛 공연만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문화센터를 창출할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고, 임영웅씨는 "명동예술극장 오픈이 옛 명성을 되찾는 길로 곧장 연결되리라고 지나치게 낙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형식의 '문화의 거리'에 대한 바람은 갖고 있다"고 했다.
결국 그들이 명동예술극장 오픈에 큰 의미를 두는 이유는 바로 명동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물질문명에 휘둘리면서 순수문화는 간과한 채 대중문화에만 집중하는 정신적 피폐를 맞고 있다"는 게 임영웅씨의 말이다. 명동이 단숨에 문화중심지로 떠오르기를 바라기보다 옛날의 따뜻함을 되찾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박정자씨도 "문화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상업성 짙은 명동에 명동예술극장 개관이 문화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거라 믿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문화예술을 버리지 않았다는 상징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는 문화예술을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아는 민족이잖아요."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정영명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3)
■ 되살아나는 명동예술극장
일제시대 영화관으로 설계된 명동의 시공관에 1957년 개관한 국립극장은 1960~70년대 최고의 공연장으로 명동의 '예술 메카' 시대를 이끌었다. 국립극장이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한 후 이 건물은 명동예술극장으로 있다가 1975년 대한종합금융에 팔리면서 극장 기능이 정지됐다.
이 자리에 34년 만에 공연장으로 재개관하는 명동예술극장은 외관상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외벽을 그대로 살리는 등 복원의 의미를 충실히 담은 모습이다. 건물 옥상부에 유리벽을 설치해 레스토랑 등 휴게시설을 마련하는 등 약간의 차이는 있다. 1층에도 카페가 들어선다.
좌석은 예전 820석 규모에서 다소 줄었다. 2~4층에는 1개의 현대식 무대를 바라보는 552석 규모의 관람석이 들어선다. 지하에는 연습실을 갖추고 있고, 객석과 무대 간 거리가 18m 이내여서 연극을 올리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셰익스피어 등 해외 명작과 창작극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던 개관 기념작은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로 결정됐다. 창작극을 올리기로 의견이 모아진 뒤 '만선' '환절기' '위대한 실종' 등도 거론됐지만, '맹진사댁 경사'에 전통 혼례 장면이 있어 개관의 잔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맹진사댁 경사'는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던 창작연극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 위주의 공연이 열릴 명동예술극장은 대관보다 자체ㆍ공동제작 위주의 공연으로 운영될 전망이다.
명동의 문화를 풍성하게 가꾸는 데 도움이 될 옛 명동 사진전, 명동 추억담 시리즈, 각종 공연의 사진ㆍ자료전시회 등도 마련될 예정이다. 명동에 대한 향수를 지닌 장년층이 우선적인 타깃이 되겠지만 주차장을 갖추고 있지 않아 정확한 타깃 관객은 극장 개관 이후에라야 명료해질 것으로 보인다.
김소연기자
■ '문화 1번지' 부활 알리는 명동의 공연장들
명동이 대한민국 '문화 1번지'였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기운은 명동예술극장으로 복원되는 옛 국립극장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요즘 부쩍 늘어난 일본인 관광객들을 포함한 쇼핑객들로 번잡한 명동 거리에 새 공연장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34년 간 명동을 지켜온 삼일로창고극장은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 4월 중순 문 여는 '해치홀'
신축 건물인 명동 M플라자 5층에 들어선 다목적 공연장 '해치홀'은 4월 중순 개관을 앞두고 막바지 점검이 한창이다. 190석(가변형 최대 200석)의 이 극장은 공연기획사 크레디아가 운영을 맡아 개관 기념작으로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해치'는 올해 서울의 상징으로 선정된 전설의 동물 해태를 가리키는 원어(原語)이다.
해치홀은 명동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과 젊은층을 겨냥해 새로운 한국형 쇼와 뮤지컬 중심으로 운영될 계획. 개관 공연 사물놀이에 이어 포크그룹 해바라기의 콘서트, 뮤지컬 '사춘기'를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윤보미 크레디아 공연장사업부장은 "주변 상권이 좋고 유동 인구도 많아서 관객 유치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며 "문화의 중심이던 명동의 이미지도 새 극장이 안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 '명동아트센터'와 '유치진극장'
명동 초입의 유네스코회관 외벽에는 지금 이 건물 내 명동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넌버벌 퍼포먼스 '애니비트-누들 편'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410석짜리 극장이다. 동숭아트센터 씨어터컴퍼니가 운영하는 이 극장도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하고 있다.
그동안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비보이 공연 '마리오네트'를 선보였고. 현재 공연 중인 '애니비트-누들 편'은 앙숙지간인 두 국숫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코믹 무술 퍼포먼스다. 관객의 절반가량이 명동에 놀러왔다가 관람하는 이들인데, 그 중 20~30%는 외국인이다.
명동과 이웃한 남산의 옛 드라마센터 내 '유치진극장'(500석)은 올해부터 서울문화재단이 운영을 맡아 5월 재개관을 목표로 리모델링 중이다. 서울문화재단은 이 극장을 예술교육 무대로 활용할 계획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삼일로창고극장의 변신
명동성당 뒤편에 위치한 삼일로창고극장은 명동예술극장 개관 소식과 더불어 명동의 문화 부활을 낙관케 하는 또 다른 상징적 존재다. 1975년 '에저또창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이듬해 '삼일로창고극장'으로 간판을 바꿔 단 이 극장은 끊임없는 존립 위협 속에서도 34년 간 한 자리를 지켜왔다.
이 극장은 전설적인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1977)이 공연된 곳이기도 하다. 연극배우 고 추송웅이 카프카의 단편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 를 각색해 올린 이 작품은 당시 4개월 만에 6만여 관객을 동원했고, 삼일로창고극장은 표를 구하려는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어느>
그렇게 한국 소극장운동의 효시로 명성을 떨쳤던 삼일로창고극장이지만 한때 김치공장과 인쇄소로 쓰이기도 하는 등 극심한 운영난을 겪으며 어렵게 버텨왔다. 극장을 유지시키고 있는 동력은 단 하나, 자발적인 후원 인력 덕분이다.
2004년 여섯번째 대표를 맡은 음악가 정대경씨는 극장을 위해 사재를 동원할 뿐 아니라 건축 전문가가 다 됐을 정도로 직접 극장 보수에 나서기도 한다. 직원 대신 표를 팔고 진행을 도와주는 서포터스들도 큰 힘이 된다.
다행히 34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교류를 시도하는 등 삼일로창고극장에 변화의 바람이 감지되고 있다. 5월 1일부터 6월 28일까지 미국 현대연극의 대가 리 브루어가 연출하는 연극 '이상 열셋까지 세다'가 이 극장에서 공연된다. 일제강점기 천재 시인 이상의 삶과 작품세계를 그린 재미교포 1.5세 노성씨의 희곡으로,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다.
"모든 공연의 중심이 대학로로 이동했지만 공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삼일로창고극장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조금 무모하지만 34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거장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시도했다"는 게 정대경 삼일로창고극장 대표의 말이다.
좋은 공연을 통해 삼일로창고극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널리 알림으로써 해외 유명 연출가뿐 아니라 한국의 젊은 연출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작품을 인큐베이팅하는 극장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김소연기자 joolylife@hk.co.kr
■ 명동 국립극장 복원 주역 김장환씨
명동 옛 국립극장의 복원은 정부나 서울시가 나선 게 아니라 명동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의 성과다. 이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지난해까지 26년 간 명동상가번영회 회장을 맡았던 김장환(79) 명예회장이다. 사라질 뻔했던 건물을 지키고 극장으로 되살리기까지 숱한 난관을 겪을 때마다 그가 나서서 설득하고 청원하고 성사시켰다.
그가 명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8년, 무교동에서 운영하던 자신의 식당 이학을 명동으로 옮기면서부터다. 1968년 명동 재개발 반대운동부터 1980년대 명동의 가로 정비, 1990년대 국립극장 복원운동까지 그 중심에는 그가 있다.
"왜 이런 일에 나섰냐 하면 문화가 없는 명동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명동이 살아야 내가 산다, 명동이 내 회사다, '주식회사 명동'의 대표다, 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챙겼지요. 명동 국립극장을 지켜낸 것이 내 인생 최고의 보람이에요."
명동 국립극장 복원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93년 12월경.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 대한종금이 사들여 사무용으로 쓰던 이 건물이 서울시 지방문화재 지정에서 제외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씨는 명동상가번영회와 함께 문화재 지정과 명동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1993년 대한종금이 건물을 헐고 빌딩을 짓겠다고 하자 문화예술인들과 힘을 합쳐 철거 반대 운동을 펼쳤고, 1995년 새 소유주 성원그룹이 또 철거 계획을 밝히자 100만인 서명운동을 해서 다시 막아냈다. 그 과정에서 새 빌딩을 지으면 1개 층을 주겠다는 등 회유와 협박도 많이 받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2002년 복원이 최종 결정된 뒤에도 난관은 계속됐다. "어렵게 정부 예산이 확보됐지만, 건물의 감정평가액이 당초 예산의 2배가 넘는 840억원이 나왔어요. 명동의 부동산중개인을 다 모아서 설득했죠. 국립극장은 지켜야 한다, 정부가 아닌 다른 데서 사는 일이 없게 막아달라고. 결국 명동의 중개인 전원이 경매 현장을 지키며 8차례나 유찰을 시킨 끝에 정부가 싸게 매입하는 데 성공했죠."
명동 지킴이로 산 지 올해로 41년, 그는 지금도 매일 명동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명동 가꾸기를 고심하고 있다.
오미환기자
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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