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키신! 신화는 계속된다
우리는 왜 이토록 그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다른 뛰어난 연주자와 스타도 많은데, 그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마는 것일까.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만의 아우라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2일 저녁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38)의 독주회는 3년 전 그의 첫 내한공연 당시 벌어졌던 국내 클래식 공연 사상 초유의 열광과 진기록을 되풀이했다. 청중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거듭 불러냈다.
본 공연 2시간 외에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38회의 커튼콜과 10곡의 앙코르까지 마친 시간이 밤 11시 30분.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은 점점 더 커져서 나중에는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콘서트홀 로비에 긴 줄이 또아리를 틀어 건물 바깥까지 갔고, 팬 사인회는 자정을 훌쩍 넘겨 0시 35분에야 끝났다. 거대한 해일이 휩쓸고 간 것이다.
이날 정규 프로그램 1부는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중 3곡과 소나타 8번, 2부는 모두 쇼팽으로 '환상 폴로네즈'와 마주르카 3개, 그리고 연습곡 8개. 완벽하다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을 더 찾을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울 만큼 최상의 연주였다. 특히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이 압권이었다.
걸작이지만 워낙 엄청난 에너지와 기교, 집중력을 요하는 난곡이라 실연으로 접하기 힘든 곡인데, 키신은 그 결정판을 들려줬다. 이 곡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연주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쇼팽의 연습곡들은 흔히 기교를 보여주는데 그치기 쉽지만, 키신은 곡 하나 하나의 개성을 살리고 자신만의 색깔을 입힌 깊이있는 연주로 감동을 줬다.
쇼팽을 사랑하는 키신은 앙코르 10곡 중 7곡을 '즉흥 환상곡' '마주르카 op. 63-2' 등 쇼팽 곡으로 했다. 나머지 세 곡은 프로코피에프의 '악마적 암시'와 '3개의 오렌지의 사랑' 중 행진곡, 그리고 모차르트 소나타 11번 론도였다. '악마적 암시'를 연주할 때는 피아노가 부서지든지 그의 몸이 산산조각나든지 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몰입에 소름이 끼쳤다.
공연 내내 그는 혼신을 다했다. 연주할 때 키신은 존재마저 사라지고 오직 음악만 남는 듯했고, 연주가 끝나면 비로소 그의 존재가 사무치게 다가왔다. 음악에 사로잡혀 갇혀버린 수인(囚人)으로 보일 만큼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치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그에게 감동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음악평론가 장일범씨는 "키신의 연주가 3년 전 첫 내한 때보다 더 원숙해졌다"며 "키신은 매번 자신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신화를 쓰고 있다"고 감탄했다.
키신은 꼬마 때부터 놀라운 재능으로 세상을 경악시켰고, 1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젊은 대가에게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수사는 오히려 진부하다.
레퍼토리를 신중하게 골라 걸작 중의 걸작만 해 왔고, 어떤 곡을 치든 청중을 의식해 자신을 과시하는 법은 없고, 오직 음악에만 충실한 자세로 일관해 왔다. 이처럼 한결같은 성실함 덕분에 연주자로서 그는 더욱 미덥다. 그의 음악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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