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등 지음/강 발행ㆍ268쪽ㆍ1만원
아내의 매음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뒤 허겁지겁 경성역으로 도망쳐나오는 식민지 룸펜의 무기력한 내면을 묘파했던 이상 ('날개'ㆍ1936), 청계천변을 무대로 온갖 인간군상이 연출하는 풍속세태를 묘사한 박태원('천변풍경'ㆍ1936), 삶의 공동을 엿본 듯한 청년들의 허무주의적 방황을 그려냈던 김승옥('서울, 1964년 겨울'ㆍ1965)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에게 '서울'이라는 공간은 말하고 싶으나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기이한 매력을 지닌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2009년의 작가들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어떻게 감각되고 있을까? 서울을 테마로 한 여성 작가 이혜경, 하성란, 권여선, 김숨, 강영숙, 이신조, 윤성희, 편혜영, 김애란씨 9명의 신작 단편소설 모음집인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 는 그 비밀의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테마는 공유하고 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작가(하성란, 편혜영), 지방에서 자라 서울로 편입해 들어온 작가(강영숙, 김숨), 한때 서울에서 살았던 작가(이혜경), 서울에서 살아본 일이 없는 작가(윤성희) 등 작가들마다 이 거대도시와 관련해 축적된 경험의 편차는 사뭇 다르다. 서울,>
그러나 '무작정 상경'이라는 한때의 유행어가 상징하듯 서울은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는 블랙홀과 같은 공간, 9명의 작가에 의해 포착된 이 도시의 표정이 다른 듯 닮아있는 것은 과연 서울을 다룬 소설집답다.
하성란씨는 '1968년, 만우절'이란 작품에서 헛된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주목했다. 작가는 부나비처럼 서울로 몰려들었던 부모 세대의 청년시절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남편의 장례식장을 찾은 친지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겨우 세 살 차이가 나는 줄 알았던 남편이 자신과 띠동갑임을 알게 되는 화자의 어머니가 친지들에게 "그 인간이 모든 것을 속였다"고 떠벌리는 장면은 희극이고 비극이다.
악다구니를 쓰며 '어쨌든 살아내야 했던' 그 시절, 어머니 앞에서 나이를 속이고 "일 한 번 내보겠다"며 청혼하는 아버지의 허풍스런 모습과 허장성세를 일삼는 시나리오작가 출신의 남편과 헤어진 뒤 새로운 남자의 청혼을 기다리는 화자의 현실을 교차시킨 마지막 장면은 지금의 서울이 그때의 서울과 얼마나 달라져 있느냐고 묻는 작가의 항변으로 읽힌다.
재개발 공사가 시작된 변두리 주택가의 낡은 빌라에 입주한 한 젊은 부부의 기괴한 일상을 다룬 김애란의 '벌레들', 신경질적이며 때로는 공포스런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김숨의 '내 비밀스러운 이웃들'은 서울로 상징되는 현대인들의 소통불가의 현실을 파고들어간다.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들끼리 "이런 집들은 얼마나 하나?" "니들 정말 차 안 살래?" 같은 대화를 일삼는 윤성희의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는 서울이라는 공간의 속물성을 드러낸다. 서울로 향하는 국도변에서 한 젊은 부부가 겪은 악몽 같은 체험을 그로테스크하게 소묘한 편혜영의 '크림색 소파의 방'은 서울이라는 익명의 도시에 뿌리깊게 스며있는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집의 기획은 2년 전쯤 이뤄졌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 대해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강영숙씨가 절친한 후배인 윤성희, 편혜영씨 등과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이들은 "축제처럼 쓰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우울한 서울의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우리를 닮은 도시의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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