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64). 그를 마주하니, 시간은 속절없이 역행한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아저씨, 추워요, 안아줘요." 최인호(원작)와 이장희(노래), 신성일(문호 역)과 안인숙(경아 역)이 암울한1970년대와 함께 달려들 것만 같다.
1974년 한국인의 감성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던 영화 '별들의 고향'이 바로 그의 메가폰에서 나왔다. 영화 속 촌스럽게 느껴지는 대사는 지금 팔팔 뛰는 패러디의 단골손님으로 변해 21세기와 소통한다. '감수성의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그도 어느덧 6순이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웃자란 우리 영화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변화의 싹을 긍정했다. 최근 막 내린 오페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연출 때문에 눈코 뜰 새 없던 그를 만났다.
- 영화감독으로만 당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오페라 연출은 낯선 변신이다.
"2000년의 '황진이'가 첫 오페라 연출작이었다. 역사성 강한 이번 오페라에서는 내 정신적 성숙을 느낀다. 6ㆍ25 당시 삶의 모습, 국제상황 같은 것까지 고려했다. 나의 현존을 위해서는 부모, 조상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과 내가 '철부지'였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도 한다. 진화하는 예술의 매력을 보여주겠다."
- 무대 작업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이제 영화와 무대를 병행해보고 싶다."
-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워낭소리'까지 10여년 동안 극심한 부침을 겪은 한국 영화판을 어떻게 보나.
"사실 지난 40년 간 영화판에서 무수하게 보아왔다. 길게 보자. 미국 영화의 예가 있다. 파라마운트나 MGM 같은 대형 제작사들이 도산하자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혁명이 일었지 않느냐? 할리우드 LA가 아니라 뉴욕서 일어난 그 운동으로 '졸업' 등 소편성 영화가 돌파구를 뚫었다.
지금 우리는 저예산ㆍ비상업 영화에 초점을 맞출 때다. 돈만 벌려고 영화를 하다 보니 작가적 의식은 사라지고, 조폭ㆍ코미디영화로 너도나도 몰렸다. 관객은 식상했고 시운도 다했다. 자본으로부터 자유스럽고, 작가의식이 최대의 관건인 저예산 영화는 분명 새 가능성이다."
- 경제난까지 겹쳐 요즘 영화판의 위기는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이번 침체는 제법 오래 가면서도, 영화 내적으로는 작품이 진지해지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돈 보고 영화판 온 사람들 다 떠나고, 작품만 생각하는 사람만 남을 것이다. 해외 영화제에서도 이전에는 비경쟁ㆍ초청 부문으로 제한ㆍ소외돼 온 한국 영화가 앞으로 본선ㆍ경쟁 부문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구체적 계획이라도.
"저예산ㆍ고예산을 떠나 이제는 작품성으로 승부 걸 생각이다. 내년 6월 전주 문화산업대 영화 전공 교수의 임기를 완료한 뒤 본격 착수할 계획인데, 백제를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 '백제의 혀'를 그 신호탄으로 잡고 있다.
전라도 음식, 독(毒)에 관한 내용인데 '올드 보이'의 각본을 쓴 황조윤이 쓰고 있다. 순 제작비가 40~50억원으로 마케팅까지 70여억원의 예산이 든다. 나는 구체적으로 기획, 시나리오를 맡고 투자자를 '땡길' 것이다."
- 영화 제작 시스템이 바뀐단 말인가.
"대기업 투자란 작품 하청에만 관계할 뿐, 소유권은 없다. 현재는 배급ㆍ투자자가 소유권을 갖는다. 시네마서비스, 사이더스 등이 제작한 영화는 인건비만 챙기는 것이다. 나는 내 제작 영화의 작품 소유권, 저작권을 갖는 제작자라는 원칙을 세우고 싶은 것이다. 옛날에는 흔했으나 1990년대초부터 그렇게 관행이 돌변했다."
- 복안이 있는 듯한데.
"나는 저작권까지 소유하는 옛 방식을 재현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투자자는 투자하고 이익 남기는 선까지만 판권을 주장, 그 이후는 내 판권과 연출권으로 돌아오게 된다. 극장 수입, 해외 판권, DVD 판권이 주인 현재 영화산업 시스템 하에서는 관례적으로 개봉 후 5년이 되면 더 이상의 수입은 없다는 것이 통설이다."
- 대기업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관례에서 저항이 만만찮을텐데.
"배급업자의 투자로 극장이 돌아가는 현실의 횡포적 관행에 나는 결국 몸으로 때우더라도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어려운 시절에 꿋꿋이 영화 만들어 온 영화인들이, 정작 풍족한 체제에서는 외면당하는 형국이다. 현실에서 도태되는 것까지 각오해야 될 싸움이다. 지켜보라. 대기업이 돈으로 육성한 젊은 영화인들은 경제 어려워지면 떠난다.
독립영화 제작자도 예외는 아니다. 의욕을 잃은 터줏대감만 영화판에 남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한국 영화를 좋아하던 관객까지 외국 영화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외국 영화가 한국 영화를 추월한 것은 1980년대였다. 케이블, 위성TV 생기면서 외국 영화가 넘치는 시대, 아이들은 자연히 외국 영화 팬이 될 수밖에 없다."
- 풍상을 견뎌낸 당신 영화의 작품 세계는.
"내게 자기 스타일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시대ㆍ사회의 변화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대중에 적응했다. 나는 변화를 거스르거나 앞서가거나 저항하지 않고, 변화의 속도에 몸을 맡긴다."
- 대중 추수주의라고는 생각 안 했나.
"그런 것 없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1976~86년 활동을 멈추며 한국 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1960년 5ㆍ16 이후 영화는 가짜 현실에 매몰됐다. 리얼리즘을 회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만든 건 그래서다. 그 작품은 배창호, 장선우 등 유능한 조감독들이 모여든 계기가 됐다."
- 그렇게 형성된 이른바 '이장호 사단'의 공과는.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 등 우리의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최대의 공이다. 이는 여균동의 '세상밖으로'로 이어졌다. 그러나 동시녹음 기술을 업고 한국 영화에 욕설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후 욕설이 흥행 코드화해 버렸다. 예를 들어 '조폭 마누라'는 의도적으로 욕설을 사용한 경우다. 나는 '우리는 왜 fucking이라고 못 할까'라고 고민만 하다 만 꼴이다."
- 그같은 부작용은 앞으로 정화될까, 심화될까.
"자정 능력이 문제다. 영화의 침체기는 잘되면 자정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주변에서 자숙의 움직임이 더러 눈에 띈다. '워낭소리'가 좋은 예다."
- 일시적 현상 아닐까.
"아니다. '워낭소리'는 서곡이다. 이후 좋은 독립영화가 본격적으로 뒤를 이을 것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촬영 등 기자재의 단순화로 제작비가 안 드니 뜻있는 자들이 용기를 갖게 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즘 가장 무서운 인터넷 마케팅에서 큰 효력이 입증됐다는 점 역시."
- 대선배로서 조언을 한다면.
"이제 영상은 영화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예술가ㆍ작가가 영화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즉 '문학적 바탕'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영화적(비디오적) 바탕만 강조하는 현재는 우려스럽다.
잘 짜여진 대본 없이, 촬영 현장에서 건져올리는 감각적인 것들 보여주자는 식으로 변해간다. 재미있는(돈 버는) 영화만 주문하는 기획자의 논리 때문이다.
해외 대감독의 권한에 비한다면 한국은 8~9할 수준에 머무른다. 1990년대 삼성, 대우, SK 등 대기업이 영화 제작에 뛰어들면서부터 영화가 마케팅, 제작 중심으로 변한 때문이다.
기존 영화인력 대신, 영화에 관심 있는 신입사원들에게 마케팅ㆍ기획 작업을 맡긴 것이다. 1년 만에 조감독 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조감독 생활만 8년 했다."
- 한국 영화 살리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화운동이 가장 바람직하다. 영화평론가들의 의식적 행동, 영화감독들의 작가주의 운동이 희망이다. 스크린쿼터 문제로 데모한 건 상업적으로 등쳐 먹힌 형국만 낳았다. 결국 영화를 썩게 만들었다."
- 북한은 영화를 국가적으로 중시하는데 통일 이후를 생각해 보았나.
"부모의 고향이 북청이라 북한에 대해 애정 많다. 아름다운 자연 등 북한이 가진 소중한 가치들을 영화를 통해 보호하고 싶다."
- 자신의 작품 셋만 꼽는다면.
(기다렸다는 듯)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영화들이다. 패러디 강한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 '바보 선언'과 '바람 불어 좋은 날', 환생을 주제로 리얼리즘과 샤머니즘이 어울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다. '바보 선언'은 지금 봐도 부끄럽지 않다."
- '이장호 류'란 것이 있다면.
"제작비가 적게 든다, 흥행을 일찌감치 포기한다는 점이다. 만일 흥행을 의식했다면 영화적으로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실패했다. '미스코뿔소 미스터코란도'나 'y의 체험' 같은 경우다."
● 내 동생 영호
이장호씨는 이번 학기에 백석예술대 신학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 "성경 안에서 미학을 찾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 계기는 신의 존재에 대해 눈 뜬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동생 영호(57)씨 때문이다. 그가 연출한 오페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형을 좇아 영화인의 꿈을 키우던 동생은 뉴욕대에서 영화학(제작) 박사과정 중이던 1989년 시력이 급격히 저하돼 귀국, 영화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 강의도 물론 접어야 했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까지 자신을 닮은 동생을 이씨는 자신보다 더 아낀다. 맹인 목사 안유한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에서의 주인공은 바로 동생이 모델이다. 동생은 현재 컴퓨터 모니터만한 글자만 인식할 뿐이라고 한다.
"음악성이나 예술에 대한 안목 등에서 나를 앞섰어요." 형제 간 특유의 경쟁심도, 영화의 길을 택한 동생에게 의도적으로 심하게 굴었던 옛일도 돌아보면 후회스럽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은 동생은 낚시까지 할 정도다. 시력 상실로 영혼의 눈을 뜬 것은 동생만이 아니었다.
이씨의 종교는 땅 위의 교회에 있지 않다. "교회에 나가지만 현실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에요. 그러나 크게 보면 하느님이 내게 시련을 주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통해 성숙했다고 믿어요." 그는 자기 작품의 최종 목표를 '신에 대한 통찰'이라고 했다.
이번 오페라 작업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작업 초반에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리허설하는데 계속 손발이 안 맞아, 절망적 감정마저 들었다"며 "화를 이기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보다못한 제작자가 연출을 양보하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지휘자에게 많은 권한을 주고 나니 갈등은 사그라들었다. "권력의 의지가 사람을 묶더군요."
그는 "이제 인생 후반기의 시작"이라며 "이번 오페라는 그 출발점"이라고 했다. 자신이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파시즘적 예수상이 아니라, 한민족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모든 민족에 통용되는 예수상이라고 했다.
무대 작업이 그에게 준 깨달음은 또 있다. "싸우지는 않을 거예요. 무시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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