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한달 내내 전 세계 야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야구 대표팀. 이들이 만들어 낸 '신화'는 신뢰의 리더십과 건강한 팔로어십이 만났을 때 어떤 결과를 내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박찬호(필라델피아) 이승엽(요미우리) 등 투ㆍ타의 핵심이 빠져 위기 속에서 출발했지만 대표팀은 김인식 감독과 코칭스태프 등 리더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도력과 팔로어(follower)인 선수들의 역할 분담 및 자기 희생을 통해 "놀랍고 환상적인 팀"(미국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평가)으로 재탄생했다.
대표팀은 당초 "1회 대회 성적(4강)은 물론 8강 진출도 쉽지 않다"던 대다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세계의 강팀을 차례로 누르고 준우승을 일궈냈다.
리더십 전문가들은 "야구 대표팀이 정ㆍ관계뿐 아니라 경제 지도층들이 어떻게 사회 구성원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비판 수용'에서 출발한 신뢰의 리더십
WBC 개막을 불과 열흘여 앞둔 지난달 23일. 김 감독은 주전 유격수 박진만(삼성)의 엔트리 최종 탈락을 전격 발표했다. 예상 밖이었다. 선수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 확고한 김 감독이었던데다 수비의 핵인 박진만 없는 대표팀 내야진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
하지만 김성한 수석코치와 류중일 수비코치 등 코치진은 "박진만이 현재 몸 상태로는 경기에 뛸 수 없다"며 교체를 주장했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김 감독은 결국 "나보다는 코치들이 박진만과 대화를 많이 했다. '아픈 사람 없이 가자'는 코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며 고집을 꺾었다.
결국 그의 선택은 유명 해외파와 국내파 주전들의 대거 이탈로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대표팀 분위기를 오히려 반전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김 감독이 가진 '믿음의 야구'가 특정 선수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팀 전체에 대한 신뢰였음을 확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실제 박진만을 내보내고 대체 선수로 뽑은 이범호(한화)는 중요한 경기 때마다 홈런과 적시타를 때려내며 '메이저리그 올스타급' 활약을 펼쳤고, 유격수에 선 박기혁(롯데)은 이를 악물고 그라운드를 누비며 그물망 수비를 펼쳐 결승행을 이끌었다.
이 같은 결과는 김 감독이 코칭스태프의 비판적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코칭스태프는 건설적인 대안 제시로 감독과 선수들과 신뢰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선빈 박사는 "팔로어십의 전제 조건은 리더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 출발한다"며 "비판 수용을 통해 신뢰를 얻은 리더들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원을 충원하고,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최적 역할 분담의 원동력은 팔로어십
이번 대표팀의 각 경기 선발 명단을 살펴보면 김현수(3번)와 김태균(4번)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경기 때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상대에 따라 전술에 맞는 '맞춤형 선수'를 기용하기 위한 전략상의 이유였고, 이 같은 선택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매 경기 메이저리거들을 대부분 붙박이로 출전시키는 일본, 미국 등과는 큰 차이였다. 이를 두고 야구 전문가들은 "선수들이 희생에 가까운 자발적 협조를 통해 최적의 역할 분담을 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고 평가한다.
대표적인 선수가 김현수(두산)와 봉중근(LG). 지난해 타격 3관왕을 차지한 김현수는 올해 소속팀에서 홈런 타자로 변신을 시도하며 야구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WBC 대표팀 3번 타자로 낙점받자 그는 스스로의 욕심을 잠시 접고 대표팀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1,2번 테이블 세터진과 4,5,6번 거포들을 잇는 교타자의 역할에 충실했고, 홈런은 하나 없었지만 3할9푼3리의 고타율로 상대 투수진을 괴롭혔다.
일본전에서만 2승을 챙긴'의사' 봉중근도 마찬가지였다. 소속팀인 LG에서 올 시즌 마무리 투수 후보로 통보받고 대회에 참가한 그였지만 대표팀이 WBC지역예선 1차전에서 일본에게 콜드게임 패의 수모를 당하자 스스로 일본전 선발투수를 자청해 패배를 깨끗이 되갚았다.
대표팀 코치들 사이에서도 소속팀에서의 역할을 고려해 불펜 요원으로 쓸 생각이었지만 봉중근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또 대표팀 최고참이었던 포수 박경완(SK)은 손목과 허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젊은 투수들의 미래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다"며 고통을 참아가며 자리를 끝까지 지켰고,
선두타자 이용규(KIA)는 선수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부상 위험을 감수하며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펼쳐 선수단에 투지를 불어넣었다.
송영수 한양대 리더십 센터장은 "지도자가 솔선수범하고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었을 경우 팔로어들도 리더에 못지 않은 책임의식으로 미션(임무)을 수행한다는 예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 권한만큼 책임도 져야 팔로우십도 지속 가능
WBC 준우승 이후 마무리 투수 임창용(야쿠르트)을 둘러 싼 '사인미스' 논란이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임창용이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3-3이던 연장 10회초 2사 2,3루에서 이치로 스즈키(시애틀)에게 적시타를 맞아 분패한 것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일부에서는 김 감독이 정면승부를 하지 말라고 포수를 통해 사인을 보냈는데도, 임창용이 무리하게 정면승부를 해 우승을 놓쳤다는 의혹까지 일었다.
자칫 준우승의 '영광'이 준우승 '책임론'으로 변질 될 수 있는 상황. 김 감독은 "벤치에서 일어나 확실하게 고의사구로 거르라는 사인을 보내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며 논란을 잠재웠다.
대표팀 출범 초기 모두가 고사하던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며 "선수 구성에 관한 전권을 달라"고 한 만큼, 결과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의미였다.
송 교수는 "정치나 정책 부문에서는 이번 '사인미스 사건'과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 지도자들이 서로 책임을 떠 넘기는 경우가 많다"며 "리더들이 구성원들의 팔로어십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권한 만큼의 책임도 스스로 지는 자세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 팔로어십을 이끌어 내는 리더십
숱한 퇴물 선수들을 재기시켜 '재활 공장장'으로까지 불리는 김 감독의 '선수에 대한 믿음'은 그의 개인적인 시련과도 연관이 깊다. 1965년 한일은행에 입단해 그 해 신인왕을 수상한 명투수였지만 그는 이듬해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김 감독은 "지금 의료 기술이면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부상이었는데 참 억울했다"며 "그래서 나는 야구를 정말 하고 싶다는 선수들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의 믿음을 지도자의 고집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WBC 최종 엔트리 결정에서부터 대회 기간 선수 기용까지 그가 자신의 감(感)에만 의존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양상문 투수코치는 "투수 교체 시기에서 항상 내 의견을 들었고, 단 한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막판 홈런으로 믿음에 보답한 추신수(클리블랜드)의 부활도 마찬가지. 그라운드에서 추신수와 살다시피 한 이순철 타격 코치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베네수엘라전 3점 홈런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현장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회 직전 김병현이 여권을 분실하는 어이없는 실수로 선수단 합류가 늦어지자 엔트리 탈락이라는 초강수를 뒀던 것도 김 감독의 믿음이 팀에 대한 신뢰이지 선수 개인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팀 전체의 기강을 중시한 과감한 결단으로 팔로어(선수)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냈다.
리더십 전문가들은 "일부 정관계와 경제 지도층들이 김 감독 리더십의 원천을 개인적인 믿음과 배려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며 "최적의 팀을 만들기 위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구성원들의 팔로어십을 이끌어내는 일련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손재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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