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 지음/청아출판사 발행ㆍ742쪽ㆍ2만5,000원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인 예조판서 김상헌과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이 마주앉았다. 최명길이 입을 연다.
"대감의 목을 가져갔으면 합니다."
"내 목을…, 하면 지천은 내게 무엇을 주시겠소?"
"저는 명예를 내놓겠습니다."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얘기가 있다. 고집스럽고 무능한 관료들이 사익을 앞세워 쌈박질만 벌였으니 나라가 망해도 싸다는 교묘한 암시와 자학이 담긴 단정이다. 하지만 조선의 정쟁을 망국적 당파싸움으로만 매도하는 게 온당할까.
TV 사극 '조선왕조 5백년' 등을 쓴 원로 극작가 신봉승(76)씨는 그런 식의 매도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는 "조선왕조의 정쟁은 높은 뜻과 이론에 의거한 신념의 대결인 경우가 많았다"며 "이를 모두 당파싸움으로 매도하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신씨가 새로 낸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은 이 같은 시각을 반영한 책이다. 시기적으로는 선조부터 순조에 이르는 230년 동안을 다뤘고, 당대의 대표적 정쟁 31건과 그 시대상황, 그 속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의 뜻과 행동을 드라마처럼 재현해 유장하게 담아냈다. 조선>
이 책엔 사실과 허구가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에 바탕을 두면서도 정쟁의 주인공들과 정황을 극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됐다. 일종의 팩션(factionㆍ사실을 기본으로 하되 최소 필요량의 허구를 가미한 글쓰기 장르)인 셈이다.
저자는 이를 '행간으로 읽는 역사'라고 했다. "역사서의 문자만 읽으면 부분은 읽어낼 수 있으나 시대정신을 간추리기 어렵다"며 "재미와 통찰을 위해 역사서의 문자와 문자 사이에 비어있는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 얘기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일까. 병자호란 당시 정적인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대좌 사실과, 당시 이들이 정쟁을 초월해 나라를 위해서 각각 명예와 목숨을 내놓자는 묵시적 합의에 도달했다는 사실 같은 기초적 상황은 실록에 근거했다는 것이 저자의 얘기다. 반면 당시의 구체적인 대화나 정황 묘사 같은 극적 요소는 상상력의 산물인 셈이다.
최고의 사극작가인 저자가 생생하고 다양하게 그려낸 당대 인물들의 성격을 음미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의 하나다. 선조 때 서인의 거두였던 좌의정 정철은 담대하고 강직하지만 타협을 모르는 자신감과 외골수 때문에 몰락의 운명을 맞게 되고, 느긋하고 속깊은 영의정 이산해는 결정적 순간에 딴청을 부리면서 위기를 모면한다는 식이다.
저자는 "조선의 정쟁은 버릴 것보다 배울 게 더 많다"며 "정쟁을 파당싸움인 당쟁으로 착각하면서 그것을 매도만 했던 어리석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인철 기자 icj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