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중구 중림동의 소중한사람들교회(담임목사 김수철) 지하 1층 강당.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숙인 1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노숙인 전용 교회인 이곳에서 매일 열리는 오전 예배에 참석한 뒤 점심을 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날은 더 중요한 용무가 있었다. 빈자의 베풂을 실천하려 장기 기증 서약에 나선 것이다.
서약서를 받아쥔 노숙인들은 "나눔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의 나눔"이라는 김수철 목사의 설교를 경청했다. 김 목사는 "장기 기증을 통해 노숙인은 얻어먹고 폐만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강단에 선 황성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팀장은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으로 평생 어둠 속에 살던 노인이 50년 만에 빛을 얻었다. 사후 각막 기증으로 2명, 뇌사 때 장기 기증으로 9명이 새 삶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숙인들은 '사후에 각막 기증' '뇌사자 장기 기증' '살아있을 때 신장 기증' 등 서약서에 제시된 세 항목 중 원하는 곳에 표시했다. 김 목사와 황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결심을 굳혀 서약서 작성을 끝낸 이들도 있었다.
추기경처럼 각막 기증을 약속하는 이들이 많았고, 전 항목을 표시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서약서를 제출한 사람은 88명. 뜨거운 호응이었다.
박모(36)씨는 "1주일 전 장기 기증 제안을 받고 한참 고민하다가 추기경님을 생각하며 각막 기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카드 빚과 갑상선 이상으로 2년째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하루 빨리 재기해 뜻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외환위기 때 공장에서 팔을 크게 다쳐 떼밀리듯 길거리 삶을 시작했다는 장모(54)씨는 "세상에 대한 서운함은 없다. 죽으면 썩을 몸, 아픈 사람 돕는데 쓰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각막, 장기, 신장 모두를 내놓기로 했다.
2007년 2월에도 이 교회 노숙인 72명이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 김수철 목사는 "노숙인들이 무일푼 처지에서도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다는 자존감을 얻는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사진 고영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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