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안 오지.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21일 오후 1시30분 강원 홍천군 서면 모곡4리 마을회관. 모곡3ㆍ4리의 초ㆍ중학생 15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마을회관 어귀에 흰색 마티즈 차량이 들어서자, 아이들은 "선생님이다!"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달려나갔다. 2주일에 한 번 '공부방'이 열리는 토요일 오후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차에서 내린 선생님들은 '산 너머' 청심국제고(경기 가평군 설악면) 2학년 김양현(17) 신유진(17) 심다은(17)양과 조인성(17)군. 얼싸안고 매달리는 등 떠들썩한 인사가 끝나자, 중학생 2개 반, 초등 고학년ㆍ저학년 반 등으로 나뉘어 공부가 시작됐다.
특히 올해 중학생이 된 남궁민희(13), 김다슬(13)양과 김영민(13)군은 내신 대비를 위해 영어와 수학 외에도 국어, 사회, 과학 공부는 물론, 학교생활 지도까지 받는다. 개구쟁이 영민이가 "친구들 하고 운동도 하고 좀 더 놀다 공부하면 안돼요?"라고 물었다가, '신 선생님'에게 '꿀밤'을 맞고 말았다.
"운동은 평일에 친구들 만나서 하면 되잖아. 이제 중학생이 됐으니 운동 시간 조금 줄이고 국ㆍ영ㆍ수 등 주요 과목을 중심으로…." 유진양은 선생님다운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마을 전체가 손꼽아 기다리는 공부방은 지난해 7월 유진양의 아버지 신종서 강원대 교수의 'SOS'로 시작됐다. 홍천축협 사외이사로 활동하던 신 교수는 축협 관계자로부터 "산골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기 힘들어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듣고 딸에게 과외를 제안했다.
유진양은 가까운 친구들과 뜻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격주 토요일마다 모곡리를 방문, 하루 4시간씩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TLE'(Teaching, Learning & Enjoy)라는 모임 명에는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도 배우고 즐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서먹하던 애송이 선생님과 개구쟁이 제자들은 이제는 자주 전화 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절친한 사이가 됐다. 영민군 엄마 박은숙씨는 "학원에 다니려면 인근 춘천이나 홍천까지 1시간 가량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열악한 환경인데, 실력이 검증된 과외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쳐 주니 학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말했다.
8개월 여에 걸친 TLE 선생님들의 열성적인 지도에 학생들 실력도 쑥쑥 높아지고 있다.
지난 1일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대본을 쓰고 캠코더로 촬영한 영어 영화 '신데렐라'를 상영했다. 분장이나 의상, 연기 등 모든 것이 어설펐지만, 학부모들은 "너무 기특해 가슴이 뭉클했다"며 칭찬을 쏟아냈다. 영상 편집을 맡은 양현양은 "15분짜리 영상을 만드느라 6시간 넘게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으면서 찍었다.
'NG 영상'도 따로 만들고,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임수빈(12ㆍ한서초6)군이 '김치 볶음밥 만들기 영어 레시피'를 UCC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남궁호(12)군도 "누나들과 놀면서 공부하다 보니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고 기본 문법도 알게 됐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고등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청심 국제고에 가는 게 좋겠어요. 그러려면 굉장히 열심히 공부해야겠지만요."
2주일에 한 번 열리는 공부방은 학생들 입장에선 너무 아쉽다. 그렇다고 역시 학생인 선생님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어렵다. 특히 대입 준비에 매진해야 하는 3학년이 되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은양은 "사실 토요일 이 맘 때는 다른 친구들은 서울에 있는 학원에 가거나 자습을 하면서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느라 바쁜 시간"이라고 털어놓았다.
TLE 회원들은 공부방 활동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지난 18일 청심고 1학년 신입생들을 상대로 신입 회원 모집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인성군은 "무려 19명이 지원해 그 중 8명을 뽑았는데 모두 실력도 좋고 봉사활동 의지도 강해서 좋은 선생님이 될 것 같다"면서 "선생님들이 늘어났으니 매주 토요일마다 공부방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부방 선생님들의 장래 희망은 물리학자(다은), 외과의사(양현), 경제학자(인성) 등 다양하다. 의사가 꿈인 유진양은 이번 봉사활동 경험을 꾸준히 살려 국제 민간 의료구호 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읽으며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제가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 의술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요."
강주형 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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