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부터 울산에서 터를 잡고 사는 정일근(51) 시인의 열 번째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발행)에서는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난다. 고래가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머리를 내미는, 동해바다라는 밑그림에 시인은 '기다림' 이라는 시어를 채워놓는다. 기다린다는>
'먼 바다로 나가 하루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잠영하는 동해안의 고래떼에 기다림의 열망을 투사한 시인은, 곧 호남선 열차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남해바다로 향하는 정경을 상상한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기적소리처럼 시인의 심장 박동 소리는 높아진다. 드디어 플랫폼까지 바다가 출렁일 것 같은 여수역에 도달한 그에게, 바다는 가장 넉넉한 보금자리로 다가온다.
'떠나는 바다가 아니라 우리의 바다/ 바라보는 바다가 아니라 마주보는 바다/ 모든 것 다 받아주는 바다가 거기 있어… 주머니 텅텅 빈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으스러지도록 껴안아주는 친구 같은 바다'('모든 기차는 바다로 가고 있다'에서)
모든 인류가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에서 나왔듯, 바다와 함께 그의 시의 뼈와 피가 되는 또다른 축은 어머니이다. 시인에 따르면 어머니는 그에게 "시를 준 존재"다. 쉰이 넘은 아들을 위해 김장배추를 담그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상이 떠오른다.
'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詩다/ 어린 모종에서 시작해/ 한 포기 배추가 완성될 때까지/ 손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 손등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 있었기에/ 어머니의 배추는/ 이 겨울 빛나는 어머니의 시가 되었다'('어머니의 배추'에서).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왔기에, 수술을 마친 노모에게 '어머니 환자복 갈아입히며/ 어머니 흰 젖가슴 꼬집어 본다/ 다시 시집가도 괜찮겠다는'('어머니, 여자라는'에서) 하고 농담을 던지는 시인의 모습조차 애틋하다.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씨는 신문기자 일을 하며 울산에 정착한 뒤 1990년대 말부터 고래보호운동을 시작, 요즘도 매주 고래조사선을 타고 동해바다로 나간다고 한다.
김만수(포항), 황을문(포항)씨 등 인근 바닷가 지역 시인들과 함께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 모임'도 이끌고 있다. 그는 "바다, 고래, 어머니는 내 시의 영원한 화두"라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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