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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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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꽃

입력
2009.03.1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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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돌.

내가 쫓아갔던 공기 속의 돌.

너의 눈, 마치 돌처럼 눈 먼 눈.

우리는

손이었지,

우리는 어둠의 바닥까지 퍼냈네, 그리고

여름이 넘어오던 말을 발견했네.

꽃- 장님의 말

너의 눈 그리고 나의 눈

그 두 눈이 꽃에 물을

주었지.

성장.

꽃잎과 꽃잎

이파리도 꽃잎 주위에 더해졌네.

이런 말과 같은 말, 한 마디만 더, 그리고 추들은

공중에서 흔들거리네

파울 첼란(1920~1970)의 시는 흔히 '비의의 서정시'라고 불린다. 그가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이어서 유대인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했고 파리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결국 자살을 했지만 시는 독일어로 썼다는, 그래서 전후 독일시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는, 그의 전기를 우리가 잊어버린다면.

이 시는 널널해서 모든 해석이 가능해진다. 시의 행과 행 사이에는 단어들만 존재한다. 그 단어들이 뿜어내는 향기만이 존재한다. 흔들린다, 공중에서, 그냥 은은히 흔들리며 그 공명을 공기 속에 줄 뿐이다. 그리고 너의 눈과 나의 눈은 꽃을 피우기 위하여 물을 준다.

'내가 쫓아갔던 공기 속의 돌', 그건 아마도 어느 아침에 당신이 일어날 때 아무 이유없이 눈 앞에 떠오르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눈 앞에 어른거리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냥 널널한 공중에 떠있는 시어 사이에 흔들거리는 당신의 존재, 그것 자체일지도 모른다. 첼란의 언어는 꼭꼭 씹어서 천천히 넘겨야 하는 불안한 위장병을 가진 이들의 언어이다.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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