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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제발 행복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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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제발 행복하거라"

입력
2009.03.1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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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3시간 남짓 기차를 타야 하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열차 좌석이 마주보고 앉는 곳이었습니다. 일도 끝냈겠다 모처럼 홀가분하게 여정(旅情)을 즐길 수 있겠다는 기대가 깨지면서 좀 씁쓸했습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젊은 엄마가 제 주변 자리를 차지하고부터는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고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급기야 음료수를 쏟고 남매가 티격태격 손찌검들을 하기에 이르자 제 인내도 한계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사태를 어떻게 풀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에게 아이들을 좀 살펴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점잖게 한 마디 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곧 그만 두었습니다. 그랬을 때 되돌아올 반응이 결코 아이들을 보살피는 쪽으로 나오지 않고 저를 '보살피는 쪽'으로 나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내가 야단을 친다고 이 아이들이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이들과 함께 노는 거다!'였습니다. 저는 한껏 키를 낮추고 부드럽고 따듯한 목소리로 웃음을 한 얼굴 가득 담고 아이들에게 참 예쁘다든지 어디 사느냐 라든지 어딜 가느냐 라든지 하는 물음을 조심스럽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저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을 뿐만 아니라 제가 옆에, 그리고 앞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엄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세 사람에게는 '있지 않은 사람'으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괴범들이 많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이 이야기를 걸면 절대로 대답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 것입니다. 갑자기 아이들이 측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잘 사는데 참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어른으로 그 아이들 옆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너희에게 물려주었구나. 미안하다.' 화는커녕 아픈 자책을 겨우 겨우 먼 데 창 밖을 바라보면서 달랬습니다.

다투고 히득거리고 쏟고 난리를 치던 것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큰 녀석은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작은 녀석은 엄마 옆에 기대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대응하는 엄마는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꼭 그런 것만 같지는 않았습니다. 휴대전화로 쾌활하게 담소한 것이 조금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듣지 않을 수 없어 들은 것인데, 그 엄마는 다음 주에 있을 학교 급식봉사 일을 같은 반 다른 어머니와 의논하는 것 같았습니다.

'젊은 아이가 꽤 밝히데요...그래요. 그거면 돼요. 셋이 합하면 살 수 있어요. 그래요...그날 늦지 말아요...' 전화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젊은 아이'는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고, '그거'는 돈의 액수일 게고, '살 수 있는 것'은 담임께 드릴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평소 같으면 공공 장소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통화를 해야 하느냐고 제가 짜증을 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기조차 했습니다. 무료한 탓이기도 했지만 통화내용이 신문의 정치기사를 읽으며 느끼는 '자조적(自嘲的)인 재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이는 선뜻선뜻 응해주지 않는 엄마 옆에서 칭얼대듯 묻고 또 묻고 있었습니다. '이 기차가 KTX야?' '응!' 'KTX가 제일 빨라?' '응!' '왜 제일 빨라?' '제일 빠르니까 빠르지.' 아이가 만족할만한 답변일까 의심스러운데 아이는 더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른 것을 묻습니다. '집에 몇 시에 가?' '9시에 서울 도착이야.' '왜 9시에 도착해?' '9시에 도착하니까 9시에 도착하지!' 아이는 다시 묻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가 그 대답에 만족할까 다시 의심스럽습니다.

물음은 불가피하게 되물음을 낳습니다. 사물에 대한 '왜'는 그것이 되풀이 될수록 인식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왜를 물어 대답에 이르고, 그 대답에 대해 다시 왜를 물어 그 대답에 이르고, 다시 그 대답에 대한 왜를 물어야 합니다. 물음은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동어반복은 대답일 수 없습니다. '왜 빨개?'에 대한 답변이 '빨가니까 빨갛지!'하는 것은 답변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왜 빨가니까 빨간 거야?'하고 묻는 것은 정직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빨가니까 빨간 것이기 때문에 빨간 거야!'하는 답변은 부정직한 답변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는 정직한데 엄마는 부정직합니다. 동어반복은 전혀 답변이 아닌데 그것을 답변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곤혹스러워졌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저런 답변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저 아이의 인식의 지평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은 채 거기서 정지하고 말 텐데 이를 어쩌나' 하는 생각과 '어쩌면 저 아이는 엄마에 대해 체념 비슷한 관용을 베풀고 있는지도 몰라. 엄마에게는 더 기대할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왜를 스스로 밝혀나갈지도 몰라.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 사이를 바쁘게 오갔습니다.

아이의 물음은 주제를 연이어 옮기며 계속 이어졌습니다. 답변은 여전히 그 고정된 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참 편한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엄마가 귀찮게 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를 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그 발언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짐짓 화장실에 가는 양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공간에 잠깐 머물렀습니다.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곧 한강을 건널 즈음에 이른 것 같았습니다. 불빛이 휘황했습니다. 불현듯 저 자신이 모든 것에서 유리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 불빛에서도, 이 속도에서도, 마주 앉는 자리에서도, 아이들에서도, 젊은 엄마에서도, 동어반복의 논리에서도 저는 떨어져 나온 미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커다란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밝고 환했습니다. 아빠가 차를 가지고 역에서 기다린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이들은 환호했습니다. 둘 다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짐을 챙기느라 부산했습니다. 저는 제 자리에 앉을 염을 내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저는 아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즐거웠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속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제발 행복하거라!' 그리고 엄마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차에서 내리자 밤인데, 서울역은 참 환했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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