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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 "외할머니가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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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 "외할머니가 오셨어요"

입력
2009.03.1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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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인천 부평동의 한 연립주택. 개구쟁이 재민(6), 재영(5) 형제가 쉴새없이 장난을 쳐대는 통에, 뜨개질 하던 외할머니 페델라 쥬박(55)씨의 손길이 자꾸 멈췄다.

"형아, 동생아, 아야오 바(그러면 안돼). Sit down, please!(좀 앉아)" 할머니는 필리핀어와 영어에 더듬거리는 한국말까지 섞어가며 야단을 쳤지만, 목소리와 눈길엔 '외손주 사랑'이 담뿍 담겨있다.

쥬박씨는 지난해 9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배로 사흘 걸리는 남부 파바오에서 1년 예정 F1(방문동거) 비자로 한국에 왔다. 영어강사 일로 바쁜 맏딸 메릴린(34)씨 대신 어린이집 다니는 손주들을 돌봐주기 위해서다.

그는 2003년 한국에 시집온 메릴린씨가 2004, 2005년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을 때도 석 달씩 딸 곁에 머물며 출산과 산후조리를 도왔다.

필리핀, 몽골,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할머니들이 '사돈 나라' 한국을 찾고 있다. 딸을 머나먼 이국에 시집 보내고 가슴앓이만 하던 이들이 보따리 싸들고 한국에 체류하며 딸의 산후조리나 손자녀 양육, 살림살이를 돕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 탓에 산전 우울증도 많이 겪는 결혼 이주 여성들에게 이역만리 고향에서 찾아온 친정엄마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메릴린씨도 "첫째가 4.6㎏짜리 '왕애기'여서 수술 했는데 엄마가 옆에 있어 든든했다"고 말했다.

쥬박씨는 딸이 출산 1주일 만에 집안일 하려는 걸 말리다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마띠가스 앙 울로(말을 안 들어요)." "누굴 닮았겠어요." 아웅다웅하는 모녀가 자매지간 같다.

메릴린씨는 매일 밤 9시 넘어서까지 학원 등 4군데를 돌며 일하느라 녹초가 되기 일쑤지만, "엄마가 애들 봐주시고 나도 기댈 데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월 수입 90만원 중 일부를 떼 막내동생 라이언(18)의 대학 등록금도 보탠다.

쥬박씨는 5년 전 첫 방한 땐 모든 게 낯설고 고향 생각이 간절해 딸 몰래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심심하지 않냐'는 물음에 고개를 흔든다.

"딸, 사위, 손주들과 같이 주말에 설렁탕 먹고, 1주일에 한 번 한국어 수업도 듣고, 종이 접기 강의도 듣고, 딸이 쉬는 월요일에는 둘이서 헬스클럽 가 러닝머신 타요." 그래도 고국이 그리우면 화상채팅을 하거나 인터넷으로 필리핀 드라마를 본다.

쥬박씨는 "괜찮아" "하지 마" 등 간단한 한국말을 곧잘 구사하고, 손주들 영어 선생님 노릇도 톡톡히 한다. 재민이 형제도 그런 할머니를 잘 따른다. 자기들끼리 다투다 할머니가 짐 챙겨 떠나는 시늉만 해도 울며불며 "할머니 가지 마세요"라고 매달린다.

환경미화원인 사위 서성태(44ㆍ환경미화원)씨도 퇴근 후 집안 구석구석 빗질을 하며 "청소는 제가 한 수 위죠"라며 농담을 건넨다. 서씨는 "장모님이 오시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오래 계실 수 있도록 재밋거리를 찾아드려야겠다"고 했다.

메릴린씨처럼 최근 다문화 가정에서도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친정 엄마에게 'SOS'를 구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에 시집 온 지 15년이 넘었다는 김난시(41) 인천 필리핀이주여성모임 부회장은 "주변에 한국을 찾는 필리핀 할머니들이 1년 새 부쩍 늘었다"고 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올 1월에만 동거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은 6,251명에 달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동남아 등지에서 딸을 찾아오는 50대 이상 여성들도 추정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 온 외할머니들이 모두 행복해 하는 건 아니다. 최근 한 여성단체에서 상담을 한 몽골 출신 M(25)씨의 경우가 그렇다. 지난해 산후조리를 도우러 온 M씨 어머니(45)는 한 살 아래인 일용직 근로자 사위가 갓 몸을 푼 딸에게 "여자가 말이야"라며 마구 일을 시키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안사돈은 기껏 필리핀 음식을 해주면 냄새 난다며 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어머니는 6개월 만에 짐을 싸 떠났다. M씨는 "남편이 항공료를 부담했는데 비행기 삯으로 가정부를 구하려 한 게 아니냐"며 울먹였다.

향수병에 시달리다 떠나는 할머니들도 적지 않다. 이주여성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이 제대로 꾸려지지 않은 현실에서 페델라씨처럼 한국에 연착륙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한 필리핀 할머니는 석 달 동안 집에만 머물며 손자를 돌보다 짐을 쌌다.

그는 공장 다니는 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고 했다. 남편들도 양육 문제 등으로 항공료를 들여 불러놓고선 "말도 안 통하는데다 나중에는 가족들까지 불러들인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김성미경 인천 여성의 전화 회장은 "이주여성 부모들이 육아와 살림을 담당하다 보면 한국어 교육이나 기타 여가 문화 접촉이 힘들 수밖에 없다"면서 "다문화 가정을 위한 지원 방안에 할머니들이 아이들과 함께 와 즐길 수 있는 맞춤형 프로그램이나 찾아가는 서비스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재용기자

강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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