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밤중 두 시가 미처 안된 시각. 전화벨이 한번 울리는 사이 목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했더니 동료가 남아 있다. "웬 철야 농성이냐"고 한마디하고서 설렁탕을 사 들고 위로 방문, 혹은 동조 농성에 합류한다. 나는 밤을 새고 작업할 체력이 없는지라 일이 밀려 다급해지면 우리들은 가끔 그렇게 조우한다.
젊은 연구자들의 모습은 비슷하게 닮아간다. 눈은 충혈되고 이마는 생각에 집중하느라 돌출되어 있다. 머리 속에는 칸을 메워야 할 여러 종류의 지면이 들어 있다. 이 작업 조금하다가 또 다른 일감으로 옮겨 가서 자판 좀 두드리느라 컴퓨터 문서창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다른 학교 사람 만나면 "너네는 논문 의무 편수가 몇 개냐"고 물어보는 것이 첫 인사다.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 학자들이 올 때도 나는 우선 안색부터 살핀다. 언젠가부터 이들의 표정과 행동거지가 우리와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다. 학회 참석 외에도 자신의 숙제를 하느라 일감을 들고 오고, 논문 마감일을 맞춰야 한다며 노트북 자판을 밤새 두드려댄다.
컨베이어 벨트 없는 지식생산 공장이 지구촌 곳곳에서 가동되고 있는 셈이다. 지식인들의 삶의 방식이 평준화되고 있다. 더욱이 지식 생산과 소비, 유통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니 납기일 맞춰 신상품을 출하하고 시장반응 살펴보고 다시 고객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다들 안간힘을 쓴다. 좋은 일일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예전 선생님들이 연구와 교육과 사회적 기여의 삼각형을 조화롭게 연주해 갔다면, 요즘에는 승진이나 현재 지위를 유지하는 데 사활적 관건이 되는 논문에 집중하느라 외줄을 타고 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적용하자면 차세대 교육이나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한들 여력이 없는 것이다.
다재다능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기의 상품가치를 알아주는 곳을 찾아 떠났다. 나이 들어서도 여태껏 공부하는 업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별 재주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기초연구의 성과는 쉽게 표가 나지 않으니 평생, 아니 42.195년은 연구한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지적 호기심과 자기 성취를 동력 삼아 일을 하는 것이기에 누가 하라 마라 해서 성과를 더 내거나 덜 내거나 하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득바득 생산량 경쟁의 트랙을 도는 동안 본인은 물론 아이도 노부모도 아파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쉬어가야 할 때 대체할 주자는 쌓여 있으니 생존압력은 높아져만 간다. 이들이 어떻게 버티는가. 운동이나 삼시 세끼 먹는 것 외에도 나름의 묘약들이 쌓여 간다. 조사해보면 연구실 방방마다 이런 것들이 나온다. 야채즙, 홍삼액, 등푸른생선 추출물, 꿀벌 천연항생물질인 프로폴리스... 그 종류가 육해공을 망라한다.
지속가능한 개발은 환경과 경제 영역의 화두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지속 가능한 연구자 보호를 위해서 도핑 테스트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매실 먹고 연구하는 것 금지. 무슨 오메가 어쩌고 장복 금지. 영양제 반입 금지…
한 친구가 갈수록 사는 게 힘든다며 스트레스로 암 세포가 마구마구 증식하는 것 같다고 하길래 그 말이 친구의 몸으로 들어가 나쁜 씨가 될까 무서웠다. 얼른 "아, 사리(舍利) 하나가 추가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자"고 말한다. 평범한 사람을 사리 생산자로 만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윤혜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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